최상현 주필

 
매월당 김시습의 시에 ‘사청사우(乍晴乍雨)’라는 시제(詩題)의 작품이 있다. ‘사청사우’는 ‘개었다 궂었다’를 되풀이 하는 날씨를 말한다. 자신에 대해 ‘칭찬했다 헐뜯었다’ 하며 왔다 갔다 하는 변덕스러운 세상 인정을 그 같은 날씨의 변덕에 비유(parody)한 풍자시다. 김시습은 이 시에서 하늘의 움직임인 날씨도 그렇게 변덕스러운데 하물며 세상의 인정이야 오죽하겠느냐면서 그것에 개의치 않겠다는 심중을 드러낸다. 이런 대목이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어찌 봄이 다스리랴 구름이 가고 오더라도 산은 다투지 않아라(花開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화개화사춘하관 운거운래산부쟁)’. 이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염량세태(炎凉世態)적인 평가에 대한 그의 초월적인 대범함을 잘 말해 준다.

그렇더라도 그가 민초(民草)들의 고초에 대해서도 초월해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다. 비록 그는 부평초처럼 떠돌았지만 민초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만은 변함이 없었다. 한편으로 김시습은 학식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였으나 벼슬 욕심으로부터는 자유스러웠다. 그런 사람이 잘못된 고관 인사를 보고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사람이 이런 자리를 맡게 되었나’ 하고 탄식했다면 이를 자기 푸념에서 그리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시습이 살았던 시대의 절대군주는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다. 따라서 고관 인사든 뭐든 매사가 기본적으로 군주 자신의 자의에 달려있는 것이지 꼭 백성의 요청과 바람을 헤아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군주제는 매사가 잘못돼도 군주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어서 국민에게 책임이 전가되고 국민만 불행해지는 미개명(未開明) 정치 시스템이었다.

지금의 한국 국회가 국민들로 하여금 김시습이 뱉어낸 한탄을 자아내게 한다.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두려워하거나 국민들에게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추호도 없다. 정말 이 국민들이 자기 가슴을 치며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국회의원들로 이런 국회가 채워져 있나’를 되뇌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국회의 야당 권력에 발목이 잡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국민들은 그런 국회가 왜 있어야 되는지를 국민이 드러내놓고 말하기 시작했으며 ‘국회 해산’을 주장하는 신문 광고도 등장했다. 예사롭지가 않다. 그렇지만 정부 발목 잡는 국회만 핑계 대며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않는 정부 역시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이 나라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역작용을 따라서만 흘러가고 있다는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김시습은 당대의 정치와 학문의 중심을 피해 야인으로 평생을 떠돌았지만 그래도 항상 주목의 대상이었지 잊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러했다. 김시습이 죽은 지 89년째 되는 1582년에는 선조 임금이 김시습의 인물 전기를 지어 올릴 것을 당대의 최고 석학인 이율곡(李栗谷)에게 명한다. 그렇게 쓰인 이율곡의 그 ‘김시습전(평민사 간 梅月堂 金時習 詩選)’에는 세종이 승정원으로 김시습을 불러 시를 짓도록 해보았더니 과연 신동이라고 자자하던 소문 그대로였다. 이때 세종이 말하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지만 백성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렵다. 그 집안에 권하여 잘 감추고 가르치게 하면 그의 학업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했다. 너무 일찍 난 소문이 천재를 망칠까 두려워하고 배려하는 놀랍도록 속 깊은 세종 임금의 말씀이 그러했다. 그렇게 말하고서 세종은 비단을 주어 김시습을 집으로 돌려보냈으며 김시습은 더욱 학업에 힘썼다.

약간 다른 내용의 얘기도 전한다. 이렇다(리가원 단국대 교수 문학박사). 세종은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으로 하여금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불러 시험케 했다. 그는 ‘어린 아이의 학문이 흰 학이 푸른 소나무 끝에서 춤추는 것 같아라(童子之學 白鶴舞靑松之末/동자지학 백학무청송지말)’라고 시구를 읊으면서 대구를 맞추게 했다. 그랬더니 김시습은 주저 없이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번득이는 것 같아라(聖王之德 黃龍翻碧海之中/성왕지덕 황룡번벽해지중)’고 대답했다. 천재성을 드러낸 완벽한 글 솜씨였다. 동자와 성왕, 백학과 황룡 등 모든 어휘와 글자가 철저하게 대구를 이루었다. 이때 세종이 명주 50필을 하사했다. 다만 그를 시험해 보기 위해 그 많은 명주를 포개어 두고 혼자 가져가보도록 했다. 그랬더니 김시습은 얼른 바느질로 50필의 명주를 다 이어 한쪽 끝을 끌면서 대궐을 나섰다. 이 일로 그의 비범함은 더욱 온 나라에 소문으로 널리 퍼지게 됐다.

그가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한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한창 포부가 부풀어 가던 21살적 삼각산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김시습은 대성통곡하고 미쳐 날뛰었으며 서적을 불살라버리고 불문(佛門)에 몸을 맡겼다. 승명(僧名)은 설잠(雪岑)이었다. 그는 불문에 들었음에도 수염은 깎지 않았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머리를 깎은 것은 이 세상을 피하기 위함이요/수염을 남긴 것은 사내대장부임을 나타내기 위함일세(削髮避當世 留髥表丈夫/삭발피당세 유염표장부)’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그는 59세로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이다. 김시습이 살던 때가 먼 옛날이건만 ‘사청사우’의 세상 인정과 ‘백성’이 있어 존재하고 언필칭(言必稱)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 고관대작들의 일탈과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는 변한 것이 없다. 어느 면에서는 은밀해지고 교묘해졌다. 이를 어쩌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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