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말로써 나라 안팎이 어지럽고 어지럽다. 개인은 말로써 일어서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대부분 깨끗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더럽다.’ 무엇보다 사람의 말이 가장 그러하다. 그래서 옛말에 ‘입은 재앙의 문이요 혀는 곧 몸을 자르는 칼(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이라 했다. 부부관계의 파탄이나 가정불화, 이웃과의 다툼, 동네나 사회 내의 갈등, 정치 싸움, 나라 간의 다툼도 입과 혀 때문인 때가 많다. 따라서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하다(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폐구심장설 안신처처뢰)’라는 말이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사람은 말로 산다. 말을 않고서야 나를 알리고 남을 이해하는 참다운 소통을 이루어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평적인 대등한 대화는 물론이고 위와 아래 사이의 대화도 충분히 좋은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매끄럽게 해야 한다. 부부관계를 파탄 내는 것은 잘못된 말과 혀다. 따라서 묵언(默言)의 관계나 과묵(寡默)이 부부금슬을 지키는 금과옥조여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말로써 사랑의 표현을 하지 않고서야 절대로 사랑이 싹트고 신뢰가 깊어질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럴 때 동원되는 안성맞춤의 표현이 있다. ‘여우하고는 살아도 벙어리하고는 못 산다’는 말이 그것이다. 어떻든 순종과 복종이 미덕인 가부장적 위계나 권위주의적 사회 체제가 아닌 이상, 적절한 말로써 시원시원하게 자기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남의 말을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유스럽고 원활하게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니까 무조건 말을 많이 한다 해서 세상이 어지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한 마디를 하더라도 그렇게 해독을 내뿜는 것과 같은 나쁜 말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주고받는 말로서, 가장 흔하고 험하게 그 말을 쓰는 자신이 욕(辱)을 당하고 국민에게 혐오감을 주며 사회를 어지럽히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거의 정치인들이다. 그만큼 이 나라 정치인 중에는 사회 활동에 출사(出仕)할 때의 가장 중요한 전제인 수신(修身)에 있어 문제를 지닌 사람들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성과 양식, 균형감과 조리(條理)에 기초한 언어 사용이 별 소용이 없는 패거리 정치 풍토가 정치인들을 그런 사람들로 몰아가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풍토에서는 인격이 반영되는 점잖은 말보다는 상대에 대한 독설이나 저주, 품격과는 상관없이 튀는 말들로 무장돼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자기 편, 자기 진영 사람들을 속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때가 너무 자주 있어 보인다. 더구나 그런 말이 아주 잘 먹힘으로써 그런 말을 쓰는 자신은 자기 진영의 중심인물이 됐다거나 자기편을 줄줄이 뒤따르게 하는 지도자라도 된 것 같은 허위의식과 자기 기만적인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이래서 세상은 항상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세상을 뒤집어 놓고 갈등으로 들끓게 하는 것이 그 같은 행태의 목적이라면 그 목적 달성은 거의 대부분 성공한다. 다만 궁극에는 독설과 저주의 부메랑이 회귀해 자신이 파멸하는 모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하여튼 이런 행태로부터 이 나라 정치인 누구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이 타고 다니는 말을 묻은 말 무덤(馬塚)이 아니라 자칫 재앙을 몰아오고 몸을 베기도 하는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을 묻은 말 무덤(言塚)이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에 있어 눈길을 끈다. 아마 이 지구상에 유일무이한 우리의 독특한 문화 유적일 것 같다. 전해들은 얘기로는 여러 각성(各姓) 문중이 모여 살던 이 마을에 400~500년 전 옛날 어느 땐가 사소한 말 한마디로 이웃 간에 불화가 생기더니 급기야는 문중 간 시비로 크게 번져 온 동네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런 사태를 걱정하던 마을 어른들이 나서 해결을 위한 현책(賢策)을 찾느라 부심하게 된다. 이때 한 과객(過客)의 기발(奇拔)한 조언을 받아들여 ‘말 무덤’을 만들고서야 마을은 다시 조용해질 수 있었다. 그의 조언은 ‘산세가 개 짖는 형상이라서 마을이 시끄럽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개가 으르렁 거리거나 짖지 못하게 하는 재갈바위로서 개의 송곳니쯤 되는 곳에 바위 3개를 세우고, 앞니에 해당하는 곳에도 바위 2개를 놓았다. 동시에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온갖 부적절한 말들을 사발에 주워 담는 연출을 통해 그 사발을 개 주둥이 모양인 주둥개산에 묻어 ‘말 무덤’을 조성했다. 그 후 놀랍게도 마을이 평온해지고 순후(醇厚)한 마을 인심이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얼마나 멋지고 빼어난 지혜의 발현인가.

지금 이 나라 정치판이 부질없는 시비로 소란하던 옛날 그 마을의 사정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내 편이 아니면 상대가 누구든, 심지어 나라의 체면과 위신이 걸린 대통령이라 해도 막 대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지 않는다. 권위주의 시대라면 용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런 공포로부터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다. 암흑가의 생리처럼 보스를 짓뭉개어야 ‘거물’이 되는 이치를 그런 ‘말의 쿠데타’를 다반사로 하는 정치인들은 잘 터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더라도 같은 집권당 안에서 대통령과 더불어 빚어진 불화가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것이 그리 오래 전 세월의 일은 아니다. 그 시절에는 대통령과의 불화가 감히 드러나기도 전에 벌써 역린을 번번이 거스르는 수하(手下)는 조용히 자신의 무대에서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조용히 다스리기는커녕 ‘배신의 정치를 국민이 끝장내 줘야 한다’고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국민에게 호소하는 코미디(comedy)가 벌어지고 있다. 답답한 상황을 이해 못할 것은 없으나 ‘배신’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 징벌을 내리든 결초보은(結草報恩)을 하게 하든 그것은 그들끼리 닦아야 할 회계에 불과하다. 애꿎은 국민을 들먹거릴 것은 없다. 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해 볼 때 정말 ‘말 무덤’이 필요한 또 한 곳은 정치인들의 활동 무대이며 그들의 치열한 싸움터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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