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왜군이 사용한 조총(鳥銃)은 당시로써는 최신무기였다. 화승총(火繩銃)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히데요시는 그 최신무기인 조총을 믿고서 ‘명나라를 치려 하니 길을 비켜달라(征明假道/정명가도)’며 조선 침공을 감행했다. 아닌 게 아니라 조총은 위력적인 무기였다. 조선군이 가진 조총의 대칭무기는 고작 전통 활(弓)이었다. 조총은 활보다 치명적이었다. 화약 터지는 소리는 귀를 찢어놓을 것처럼 컸다. 이에 조선군은 총소리만을 듣고서도 놀라 달아나기에 바빴다. 전쟁은 무기로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히데요시가 예상한 대로 조선군의 패전은 애초부터 명약관화(明若觀火)해 보였다.

일본이 조총을 입수한 것은 1543년 무역선을 타고 명나라로 가다가 풍랑에 떠밀려 규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다. 일본인들은 그들로부터 조총 두 자루를 비싼 값으로 샀다. 그들은 그것을 철포(鐵砲)라 했다. 일본인들은 그 철포를 처음엔 그대로 복제해 쓰다가 차차 개량 발전시켜나갔다. 히데요시는 그 철포의 위력에 대한 신봉자였으며 그 위력이 일본 전국시대의 혼란을 마무리 짓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 철포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이었다. 대마도주가 선물로 조선 조정에 전달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그 철포의 가치를 모르고 창고에 처박아 두었을 뿐이다. 철포가 조총이라 불리게 된 것은 그것이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해서 명나라 사람들이 이름을 그렇게 붙인 데서 유래한다. 

드디어 1592년 4월 13일 조총을 동원한 히데요시의 침략 전쟁이 펼쳐졌다.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1392년 건국 후 그때까지 2백 년 동안 긴 평화를 구가하던 조선은 왜군의 침공을 막을 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었다. 왜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봉장으로 하고 잔인무도하기로 소문난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뒤따르는 등 9개 부대로 나뉘어 일제히 쳐들어왔다. 총 병력 20여만이었다. 대마도와 부산 사이의 좁은 해협은 왜군들을 태운 함선들로 새까맣게 뒤덮였다. 그날 오후 5시 그들은 부산에 상륙했다. 그다음부터 그들에 필적할 조선군은 없었으며 파죽지세의 진격을 계속해 나갔다. 한양이 겨우 20여일 만에 함락되고 평양과 함경도가 그들 손에 떨어진 것도 채 두 달이 못되어서였다.

일찍부터 자신의 안위에 조바심을 내던 선조 임금은 왜군이 충주쯤 진격해 왔을 때 벌써 류성룡 등 중신들의 호종(扈從)을 받으며 비빈처첩들을 이끌고 평양으로 몽진(蒙塵)을 떠났다. 거기서도 왜군의 진격이 멈추어지지 않자 더 멀리 의주로 갔으며 그것도 모자라 여차하면 압록강 건너 명나라 땅으로 건너갈 태세였다. 만약 명나라의 구원군이 제때에 와주지 않았다면 진짜 그럴 뻔했던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됐다면 조선 종묘사직의 명맥도 그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한양을 떠날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이 돼서야 선조는 비로소 미루고 미루던 세자 책봉을 하는 수 없이 광해군으로 결정해 마무리 짓는다. 한편 당시 조선의 인구는 450만여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같이 빈약한 자원으로는 조총이 아니더라도 일상을 전국 시대의 전쟁터를 누비고 살아온 싸움에 능란한 왜군에 대항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든 조총이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틀림없지만, 조선군이 형편없이 무너진 것은 오로지 조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전비부족과 양병(養兵)부재, 조총에 대항하는 전술전기의 미개발과 미숙, 군사가 있었다 해도 훈련과 전쟁 경험이 모자란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것이 더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조선군은 처음에는 조총 터지는 소리만 들어도 놀라 내빼기에 바빴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왜군만 보아도 겁쟁이들처럼 도망을 쳤다. 왜군의 조총 앞에서 전통 활이 무용지물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전통 활 역시 조총이 완벽한 무기는 아닌 시대였기 때문에 잘 쓰면 여전히 유용한 무기였다. 이렇다. 조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그것이 다 타들어 가 폭약을 폭발시킴으로써 총알이 발사되도록 할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 정도의 소요시간이면 활은 그사이에 여러 대를 쏘고도 남았다. 날랜 기병(騎兵)은 적진을 유린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더구나 활에 비해 조총은 사거리가 훨씬 짧았다. 그뿐만 아니라 평지에서는 위력적이지만 산악이나 평탄하지 않은 지형에서는 조준이 쉽지 않고 명중률도 낮아 위력이 많이 떨어졌다. 거기다 왜군 전체가 조총으로 무장했던 것도 아니었다. 조총을 가진 왜군은 전체의 10~15퍼센트 정도에 불과했었다. 그러니까 조선군은 왜군과의 싸움에서 조총에 진 것이 아니라 정신 전력과 전술전기에서 먼저 졌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황망한 경황을 벗어나 조선군이 냉정함을 되찾은 뒤의 전투에서는 왜군들에게 속속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비록 명 구원군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평양성 탈환 전투가 그것이며 권율 장군의 지휘로 민군(民軍)이 함께 치러 대승한 행주대첩이 또한 그 같은 싸움이다. 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왜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그들을 괴롭힌 의병, 승병 등의 끊이지 않는 승전보가 역시 그것이다. 더구나 이순신 장군이 지키는 남해에서 왜군은 감히 오금조차 펼 수 없었다. 이순신의 이름만 들어도 그들은 벌벌 떨었다. 이순신은 한산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 등에서 수많은 왜군과 함선들을 통쾌하게 수장시켰다. 조총이 전쟁의 결정적 승리의 결정자는 아니라는 증거들이다. 전쟁에서 무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좋은 무기를 가졌더라도 정신 전력에서 지면 전쟁에서 진다. 현대 전쟁에서도 하등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평화로울 때 전쟁에 대비하는 것, 평화로울 때 전쟁을 잊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전쟁을 잊으면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망전필위(忘戰必危)다. 통일을 앞두고서 우리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교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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