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이 나무지?/ 벚나무 아래서 그녀와 만나는 것을 지켜본 옛 친구는/ 시들한 내 첫사랑을 추억한다/ 벚나무는 몸통이 너무 굵어져버렸다/ 동갑내기였던 그녀의 허리도 저렇게 굵어졌을 것이다// (...중략...)// 이제 그들은 이 별에 없다./ 벚나무 아래서 만났던 첫사랑 그 소녀도 없다./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가졌던 열일곱 나도 없다.// 돌아보면 화무십일홍,/ 잔치도 끝나기 전에 꽃이 날린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삶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구경꾼일 뿐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누구에게도 그런 알뜰한 맹세를 한 적은 없지만,/ 봄날은 간다/ 시들시들 내 생의 봄날은 간다” (정일근 ‘봄날은 간다’)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중략...)/ 봄날이 가면 그 뿐/ 숙취는 몇 장 지전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기형도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라는 시이다. 따로 똑같이.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봄날에 느끼는 절절한 정회를 표현하고 있다. 시인들에게 시적 영감을 준 이는 이미 고인이 된 작사가 손로원님이다. 그는 1950년대에 부산 용두산 중턱 판잣집에 살았다. 영도 바닷가에 이젤을 펼쳐놓고 풍경화를 그리거나 ‘광복동 초원다방’에 들러 가요계 사람들과 어울렸던 고인은 유일한 재산인 판잣집마저도 불타버리는 등 생활이 어려웠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뜨거운 가슴과 열정을 지닌 이였던 것 같다. 그 무렵 쓴 시가 희대의 절창 ‘봄날은 간다’였다. 이를 노랫말로 박시춘님이 곡을 붙여 가수 백설희씨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1954년 발표돼 지금까지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받는 곡이 됐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중략)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 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아직 미명인 새벽 4시. 필자는 이 노래를 부산의 한 대학병원 병실에서 듣게 됐다. 그것도 척추수술을 앞둔 노모의 입을 통해. 올해로 만 85세. 만성적인 허리·다리통증에 시달려왔고 기력도 많이 떨어진 어머니는 TV를 보며 가끔씩 따라 부르는 우리 가요가 유일한 낙이었다. 혼자 지내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해온 아들의 쓰라린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심장에 밀려왔다. 어머니가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건강을 회복하기를 기도해 본다.

주위에 고령자가 많아졌다. 허리가 꼬부라진 만 75세의 한 밀양 할머니는 올해로 38년째 우리 동네 재래시장에서 돼지갈비를 팔고 있다. 병실 청소를 담당하는 환경미화원들 가운데엔 60대, 70대 고령자가 많았다. 옆 병실에서 만 95세 할머니가 부러진 대퇴부 접합 수술을 받고 퇴원했다. 바야흐로 ‘노인난민시대’다. 65세 이상 3명 중 2명이 자녀와 따로 살고 있다. 노인 5명 중 4명은 생활비 마련을 위해 경제활동을 한다. 경제력 없는 고령자의 급증으로 인한 세태변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노인그룹홈 같은 노인대책이 필요할 것 같다.

환자의 낮은 읊조림을 침대 옆에 앉아 잠시 따라해 본 필자는 아침 식사를 위해 병원 밖으로 나왔다가 이제 한창 불붙고 있는 부산의 봄을 만났다. 필자의 모교가 있는 구덕산은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갈아입고 맑디맑은 공기를 내뿜고 있었다. 시락국밥 한 그릇으로 헛헛한 속을 달래던 필자는 주인 아주머니의 인생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남편이 배를 타느라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이 때문인지 그에게는 우울증과 갱년기증후군이 찾아와 병마를 이겨내려고 산을 찾아와 하루 종일 산에서 뒹굴었다. 그래도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쓰러질 듯 초라한 가게 하나가 사글세로 나온 것을 발견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는 다섯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몇 년째 국수와 시락국밥을 팔며 지내왔는데, 이제는 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이다. 병원 손님들과 고교 야구부에 식사를 마련해 주느라 바빴기 때문에 오히려 잡념 없이 건강하게 지냈다고 한다. 건물이 곧 재개발에 들어가 다시 새로운 소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그다. 하지만 그간 느낀 것과 같은 행복과 안정감을 다시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최근 우울한 뉴스가 많다. 기획사정 논란 속에 검찰 수사를 받아온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북한산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자원외교 비리 수사는 진척이 없고, 불똥이 엉뚱하게 튀어 여권실세들의 금품수수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성완종 리스트’가 정치권의 도덕성과 존재의의 자체를 의문스럽게 하며 온 국민을 낭패감으로 몰아넣고 있다. 오죽했으면 여당 내에서도 “미증유의 메가톤급 부패스캔들로 한국 보수의 봄날이 가고 있다”고 자조하고 있을까. 이대로 속절없이 봄날이 가게 해선 안 될 것만 같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