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스미마셍~”

불가마를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 눈이 한 곳에 쏠렸다. 곧이어 웃음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일본인 특유의 공중도덕이 철저히 몸에 배어 있다는 듯 두 일본 여성이 허리를 굽히고 실내로 엉금엉금 기어들어왔다. 주위에 대한 배려를 넘어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필자는 과도한 컴퓨터 작업 때문인지 결림과 통증에 시달려온 양 어깨를 뜨끈뜨끈한 불가마 벽에 댄 채 지지고 있었다. 몸을 움직여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옆에 앉은 그들에게 허리와 등을 필자처럼 불가마 벽에 대고 문지르며 찜질을 즐겨보라고 권했다. 두 여인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연신 감사하다고 몸으로 표현해 오히려 필자가 무안했다. 대체로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대부분 한국 손님들과 달리.

두 일본 여성이 들어오기 전 불가마 내부에 어색한 기류가 잠시 흘렀다. 세 여성이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수다 떨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성 한 사람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다. 온 몸에 땀이 줄줄 흐르는 좁은 불가마 안에서 인내심을 시험하며 묵묵히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들을 쳐다보며 눈총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깔깔대며 웃거나 그들만의 재미난 얘기를 떠들썩하게 나누느라 안하무인이었다. “좀 조용히 합시다.” 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한 남자 손님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개입했다. 그러자 세 사람은 입을 꾹 다물었고, 불가마는 곧바로 침묵 모드로 돌입했다. 그때 그런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싫었는지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남자 손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옆에서 사생활 얘기하는 것 주워들어도 재미있었는데….” 그러자 또다시 모두들 입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필자가 가끔씩 이용하는 찜질방은 위치가 서울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아 ‘딱’이다. 모닥불로 참숯을 태우는 공간도 별도로 마련돼 있어 무릎·허리 통증이나 각종 염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이 찾는다. 이게 과학적으로 얼마나 검증된 얘기인지는 모른다. 손님들 말에 따르면 활활 타오르는 참숯이 음이온을 방출해 공기를 정화시켜주고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 몸의 독소도 흡수한다고 한다. 가족 동반으로, 혹은 친구들끼리 놀러와 감자 고구마 떡가래 등을 구워 먹는 재미도 쏠쏠해 보인다. 찜질방 한쪽켠 허름한 문을 밀고 나서면 한적한 숲으로 난 오솔길로 통한다. 산수유 개나리가 피어 있는 좁은 산길을 찜질복 차림 그대로 잠시 오르내려본다. 불가마에서 흘린 땀이 서서히 식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다보면 힘겨운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나 잠시 한가로운 시간이 안겨주는 해방감과 힐링의 소중함을 체험하게 된다. 아름다운 그림들도 머릿속에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려본다. ‘지난해 봄 통영과 해운대를 찾았었지. 언덕길에는 동백꽃들이 반겨주고 있었지. 지금쯤 광양엔 매화가, 쌍계사 가는 길엔 벚꽃도 만개했을까.’

즐거운 상상은 여기까지였다. 샤워하러 들른 남탕에서 벌거벗은 두 남자 사이에 낯 뜨거운 다툼이 일어났다. 막 등산을 다녀왔다는 한 손님이 온탕에 앉아 얼굴을 씻자 “탕 안에서 왜 땀에 젖은 몸을 씻느냐”고 다른 손님이 큰소리로 항의하면서 분란은 빚어졌다. “당신이 무언데 오지랖 넓게 간섭이냐.” “그렇게 혼자서 물을 흐리면 되느냐. 여러 사람이 쓰는 탕 안에서…”라며 고성과 삿대질이 오가던 싸움은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끝났지만 씁쓸하기만 했다. 다름 아닌 ‘욱’ 하는 성격들 때문이리라. 쯔쯔. 어린아이도 보고 있는데, 또한 외국인도 많이 이용하는 곳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이 연출됐으니.

얼마 전 훨씬 더 눈 뜨고 보기 싫은, 참말 ‘말세 같은 장면’에 맞닥뜨린 적이 있다. 대로변 횡단보도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한 젊은 여성이 짧은 핫팬츠에 흰 허벅다리를 드러내 놓은 채 누구 보란 듯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옷매무새며 표정이 ‘난 깡패이니 아무도 말리지 말라’는 듯 거만한 모습이었다. 길을 지나던 행인들은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이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이 여성의 ‘심기’를 건드렸다.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그 여성을 가리키며 “너는 어느 집 자손이기에, 여자가 돼 갖고 길거리에서 어른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느냐?”고 했다. 그러자 그 여성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각 반격에 나서 주위를 당황하게 했다. 길에서 보도블럭 하나를 집어든 그녀는 “영감쟁이 네가 왜 내게 간섭이냐”며 던지는 시늉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에 놀라 서둘러 달아났고, 그녀는 보도블럭을 손에 들고 따라가며 외쳤다. “죽여 버릴 거야.”

지난해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4000달러에 달했고, 올해 3만 달러에 이어 10년 후엔 5만 달러 돌파가 예상된다고 한다. 누가 그리 잘사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피부에 체감되는 수치가 아니다. 3만 달러 국가가 된다고 선진국에 무조건 진입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삶의 질과 행복지수, 내면적 교양, 영혼의 충만도 등에서는 부끄럽기만 하다. 정치·경제·사회·문화·남북관계 등 각 분야에서 염치없고 몰상식적이며 실망스러운 행태가 너무 많아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왔다. 하지만, 완연한 봄은 아닌 것만 같아 억울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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