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동네 목욕탕이 좋은 점 하나가 요즘 돌아가는 여론을 다 청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심신의 힐링을 위해 새벽녘 목욕탕에 들른다. 하지만 망외의 소득을 얻을 때도 있다. 사우나에 편안히 앉아 몸을 릴렉스 시키면서 동시에 ‘뉴스와 해설’을 듣는 즐거움이다. 필자가 오늘 아침 동네 할아버지들에게서 들은 첫 번째 얘기는 목욕탕 예찬론이었다. 요즘 입장료 5천원짜리가 또 어디 있겠느냐, 물을 자주 갈아줘 온탕 냉탕에 다 때가 떠오르지 않고 깨끗해 좋다, 종업원들이 반갑게 인사해주고 친절해 자주 오고 싶다는 것. 할아버지들은 인근 찜질방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이 목욕탕이 확실한 비교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더니 곧바로 화제를 정치 얘기로 넘겼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게으르고 거만해 다음 선거엔 뽑지 말자는 데 이들의 의견이 일치됐다. 그 다음 나온 얘기가 외교문제. 일본은 여우처럼 약삭빠른 외교를 펼치는데 한국은 곰처럼 둔하기만 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남북관계도 지금처럼 무조건 대결국면으로만 가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미국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7박 8일간의 미국 방문에 나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9일 미국 연방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한다.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이다. 그는 29일을 ‘아베 데이’로 만들었다. 이번 방문에서는 미·일 방위지침 개정안이 발표된다. 또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관련한 합의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아베 총리는 그간 추구해온 ‘역사뒤집기’와 ‘평화헌법 뒤집기’ ‘대(對)중국연합구축’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된다.

문제는 과거사다. 아베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연설을 통해 미·일동맹의 진일보를 호소하면서 ‘과거사 면제부’에 관한 소신을 탱크처럼 밀어붙이려 한다. 아베의 거침없는 행보는 미국의 선택에 따른 것이다. 즉 중국의 부상(浮上)을 막기 위해 과거사 문제 선행 해결보다 미·일 군사·경제 동맹을 강화하기로 한 미국이다. 미국은 일본과 주변국의 과거사 문제는 방미 의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아베 총리는 한국 등 주변국 문제는 언급을 회피하거나 원론적 수준의 답변으로 때우고 넘어가려 할 것 같다. 이에 따라 그동안 과거사에 관한 반성을 줄기차게 요구해온 한국 정부로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것처럼 머쓱해질 수밖에. 국제적 외교적 위상 추락이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한국 외교의 실패다.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가 격랑에 빠져들고 있는데 한·미관계는 얼음장 같은 하강국면에 접어든 것 아닌가 궁금하다. 달콤하기만 했던 종전과 다른 느낌이다. 대신 미·일 관계는 화기애애한 상승 국면이다. 미·일 신(新)밀월시대라는 말까지 나온다. 미국은 중국이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아시아 패권 국가로 확고한 위치를 굳히는 것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뿐이다. 우리가 2년 넘게 과거사 문제에 초점을 맞춰 한·일 관계 경색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과 중국은 최근 정상회담도 가져 주목을 끈 바 있다. 한·미·일·중 4국 관계에서 한국 외교가 ‘지난날’에 집착하는 동안 일본과 미국, 중국은 ‘앞으로’를 택한 것이다. 동북아 외교적 풍향의 변화추이에 한국 외교가 현명하지 못하고 대응에 무디기만 한 것은 사실 아닌가. 과거사 문제를 체념하거나 포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대통령과 외교당국자들이 지혜롭고 명민하게 대처해 나가고 있는지, 국익과 미래를 위해 놓친 전략은 없는지 점검해봐야 할 때라는 뜻이다. 치밀하고 냉정한 계산이 바탕이 된 실리 외교를 펼쳐주길 바랄 뿐이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2010년 북한의 천안함 도발을 계기로 금강산관광과 대북경제교류가 전면 통제됐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강경입장에 묶인 박근혜 정부는 남북경색국면에서 옴짝달싹도 못했다. 남달리 6.25참화를 겪은 우리 국민의 정서, 혹은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 분명히 있다. 그 사이에 러시아, 중국 등이 북한의 지하자원 채굴권을 갖는 등 경제적 실익을 챙겨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북통일은커녕 현재의 소모전적인 적대시(敵對視) 국면을 서로 윈윈을 도모하는 대화 국면으로 돌리는 일조차 힘들다. 현 정부가 내놓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등 대북정책에 북한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의 어느 누가 한국에 마음 놓고 투자하겠는가.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미·일 허니문, 미·중 관계개선 등 동북아 외교적 풍랑을 이겨나가기 위한 방책은 바로 남북관계 개선 아니겠는가. 심각하기만 한 작금의 경제난에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는 가장 스마트한 외교도 곧 남북화해와 남북협력 아니겠는가. 광복 및 분단 70주년 기념행사를 반쪽짜리 행사로 하고 말 것인가. 최근 정부가 5년 만에 승인한 15t의 민간단체 대북 비료지원은 5.24조치의 예외인가. 금강산관광도 재개하고 백두산·원산 관광도 시작하며 5.24조치 해제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할 단계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필요하다고 했다. 정부는 일본 북한과의 지난(至難)한 힘겨루기를 미래지향적이고 지혜로운 협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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