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1. “어린이집이 난립하다보니 원장이 교육철학이나 보육이념도 모른 채 원생 숫자만 늘리고 돈만 밝히는 경우가 많아요. 원장도, 아이 엄마도 모두 갑(甲)이죠. 다들 왠지 차가운 벽과 같아요. 대화가 안 돼요.”

S(28, 여)씨는 5년차 어린이집 교사. 최근 직업 자체를 아예 바꿀까 고민 중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특히 인천에서 원생 상습학대가 문제가 된 이후 모든 일이 조심스럽기만한 요즘이다. 그러나 그가 고민하는 것은 보육교사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나 CCTV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한 곳에 꾸준히 근무하면 근무연한이 늘어나 근로조건이 유리해지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열악한 어린이집 보육환경이 조금도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점이 더 큰 이유다.

이곳저곳 어린이집을 많이 옮겨 다녔다. 지난해 일했던 어린이집에서 그는 유통기한 지난 간식을 어린이들에게 왜 먹이느냐고 원장에게 항의했다가 그만두게 됐다. 다른 동료교사들처럼 참으면 될 것을. 눈뜨고 그냥 수수방관할 수만 없다며 ‘소통’ 쪽을 택했다가 그만 원장과 불편한 사이가 돼 1년도 못 채우고 나오고 말았다. 자녀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나몰라하는 무책임한 엄마도 더러 있다. 교사 퇴근시간을 훨씬 넘겨 밤늦게 아이를 찾으러 온 전업주부인 엄마가 입에서 술냄새를 풍기며 왔을 때도 참았던 그였다. 또한 아이가 감기 몸살이 심한 것 같아 원생 엄마에게 전화로 알렸더니 “애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면 되지, 왜 바쁜 내게 전화하느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무안 줄 때도 꾹 눌러 참았던 S씨였다. 그가 퇴사한 것은 원장이 유통기한 지난 간식을 상습적으로 값싸게 대량구입하고 있고, 나이가 어려 따질 줄도 모르는 영아반 담임인 자신의 반 원생에게만 유독 유통기한 지난 간식을 공급한다는 것을 알고 난 뒤였다.

강서구 관내 다른 어린이집으로 옮긴 S교사의 몸은 올 들어 더욱 파김치가 돼 버렸다. 과로가 겹쳐 팔과 어깨에 통증이 심해 주말에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원장에겐 말하지 않았다. 우선 그가 맡은 아이 숫자가 무려 8명이나 돼 힘들었다. 여기에 학습계획안을 집에 가져와 컴퓨터로 작성하느라 쉴 시간이 부족했다. 때마침 신학기라 방과 후 잔무도 많았다. 벌써 2주째. 노동조합이 없어 시간외근무수당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고. 지난주엔 동료교사들과 함께 방과 후 어린이집 벽지를 도배하는 막노동까지 해야 했다. 밤 10시가 되도록 원장은 저녁도 제공하지 않았다. 교사들이 견디다 못해 무언의 반항처럼 모두 말없이 퇴근해버렸다. 그러자 다음날 원장은 핸드폰 문자로 “시간이 그렇게 늦은 줄 몰랐다”고만 해명했다. S씨는 전날 중노동 탓에 팔이 부들부들 떨려 커피잔을 땅에 떨어뜨렸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아무도 따지거나 시정을 요구하지 못했다. 소통이 전혀 안 되었지만 교사들은 이미 체념상태였다.

무상보육이 확대돼 좋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당국의 감독과 통제가 강화되다 보니 경영난에 허덕이는 어린이집이 오히려 많아졌다는 후문이다. 예전엔 원생들 출퇴근차량 운영비로 부모들에게서 2만원씩을 거둬왔다. 하지만 이젠 그마저도 수령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경영이 빠듯해져 원생에게 제공하는 급식 질부터 형편없이 나빠지게 됐고 원장들의 신경도 바짝 날카로워졌다는 것이다. 보육교사 업무도 당국의 감사에 대비한 회계문서작성 업무 등이 새로 추가돼 더 힘들어졌다. S씨는 마치 통곡의 벽 앞에 선 듯 답답하다고 했다. 만약 ‘소통’을 위해 과감히 입을 뗀다면 사직을 각오해야 하니 그냥 ‘불통’을 견디고만 있다는 얘기였다.

#2. 짜증나는 ARS 반복음. 녹음된 기계음. 인간적인 대화나 ‘밀당’이 불가능한 시츄에이션….

친구 부친의 부음을 듣고 H씨가 KTX 열차표를 예약한 것이 주말인 7일 오후. 빈소가 마련된 곳은 대구였다. 이날 오후에 일찌감치 하던 일을 마치고 서울 목동에서 광명역을 향해 출발했지만 도로가 붐볐다. 늦을 것 같아 예약을 취소하고 다음 열차를 다시 예매하기 위해 114전화번호 안내로 광명역을 문의했다. 그러나 역 대신 철도고객센터만 안내해준다. 차를 도로 한쪽켠에 세우고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전화기 안에서는 반복되는 ARS목소리만 계속됐다.

“지금은 상담전화가 많아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해지·해제 요청 전화를 할 때 들었던 말이었다. 역 주차장도 문제였다. 주차권을 뽑아 들고 주차장으로 진입해 한 바퀴를 돌았지만 세울 공간이 없었다. 이미 주차공간이 꽉 찼으면 입구에 ‘만차’라고 써붙여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주차장에서 아까운 몇 분을 또 까먹었다. 결국 그는 예약시간 1분 뒤 도착해 다음 기차표를 사기 위해 승차권 환불규정에 따라 6000원의 반환수수료를 물어야 했다. 미리 예약을 취소하지 않은 데 따른 것이라고 하니 더 따질 방법도, 시간도 없었다. ARS상담전화라는 소통 안 되는 벽에 부닥친 것이 아쉬웠을 뿐. 부탁이건, 항의건, 그 누구의 무슨 말도 더 이상 통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ARS기계음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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