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세상사에 얽혀 감옥에 들어간 벗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모바일 문자와 이메일에 밀려 사라진 육필 편지를 보며 어려서부터 이어진 죽마지우(竹馬之友)가 그리웠다. 장자 대종사(大宗師)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자사(子祀), 자흥(子興), 자리(子梨), 자래(子來)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무(無)를 머리로 삼고, 삶(生)을 등으로 삼으며, 죽음(死)을 엉덩이로 삼으랴? 누가 생사와 유무가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우리 서로 벗이 되리라.” 그들은 병에 걸려 죽을 때도 초연하게 우정을 나누었다. 나중에 자상호(子桑戶), 맹자반(孟子反), 자금장(子琴張)이 모여서 말했다. “누가 서로 사귀지 않는데도 사귀고, 서로 위하지 않는데도 위할 수 있을까? 누가 하늘에 올라 안개 속에서 노닐고 무극의 경지에서 뛰놀며 삶을 잊고 무한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세 사람은 마주보고 웃으며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없어지자 마침내 친구가 됐다. 그러나 자상호가 죽어서 장례를 치를 때 공자와 자공을 내세워 의례로 진솔한 마음을 가두려는 것을 비웃었다. 막역지교의 출전이다. 막역지교란 본래 천지의 참된 도를 깨달아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끼리의 교류를 의미했지만, 요즈음은 허물없는 친구 사이를 모두 가리킨다.

가난했을 때의 친구인 빈천지교(貧賤之交), 형제처럼 가까운 금란지교(金蘭之交), 생사를 함께하는 문경지교(刎頸之交), 어려울 때 만난 환난지교(患難之交), 나이를 잊은 망년지교(忘年之交), 신분의 차이를 넘은 망형지교(忘形之交), 이념과 사상으로 뭉친 군자지교(君子之交), 결의형제를 맺은 팔배지교(八拜之交), 능력을 알아주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상하의 수어지교(水魚之交)가 부러운 세상이다.

강희제를 도와 권신 오배(鰲拜)를 축출하고, 삼번의 난을 평정하여 반청세력을 일소했으며, 대청제국의 제도를 구축한 색액도(索額圖)는 영무전(英武殿)대학사 웅사리(熊賜履)와 막역지교를 맺고 있었다. 웅사리는 호북 효감(孝感) 출신으로 순치 15년(1658)에 진사가 된 유명한 학자이자 명신이었다. 강희 15년, 웅사리는 어음을 잘못 기재했다가 두립덕(杜立德)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초안을 거두어 씹은 후에 파손했다. 이 일로 분규가 발생하자 강희제가 제대로 심리하라고 명했다. 웅사리가 입을 열지 않자, 색액도가 “이는 본래 대단한 일은 아니나 누가 잘못했는지 심리를 해야 하네. 잘못한 사람의 죄가 드러날 것이나 선생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이 사건은 판가름될 것이네”라고 권했다. 또 “선생은 걱정하지 마시게. 지금은 반란을 일으킨 오삼계(吳三桂)와 경정충(耿精忠)도 진심으로 투항하면 황상께서 용서하실 것이니 굳이 입을 닫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했다. 웅사리는 잘못을 인정하고 대학사의 직무를 사직했다.

당시 웅사리는 사회적 명성이 매우 높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가 색액도의 모함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를 아끼던 서건학(徐乾學)이 “웅 선생께서 나서지 않으면 천하를 어떻게 다스리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초방(椒房)의 짓입니다”라고 말했다. 초방은 색액도를 가리킨다. 사실은 달랐다. 웅사리가 면직될 때 강희제는 누구를 등용해야 하는지 물었다. 웅사리는 “색액도는 반드시 웅사리가 상대해야 하고, 웅사리는 반드시 색액도가 상대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색액도를 비난해도 웅사리는 끄떡도 하지 않고 강희제에게 친구를 추천했다. 이처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해관계로 맺은 벗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존경과 신뢰로 맺은 벗이었기 때문이다. 존경과 신뢰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상대의 능력과 공정함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지 상대의 행위가 아니다. 배신이 난무하는 시대일수록 친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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