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동한의 화제(和帝)가 즉위하자 환관들이 외척의 권력전횡을 막으려는 황제를 지지하며 세력을 키웠다. 환관의 대두는 화제 때부터 시작된 어린 황제의 등극 때문이었다. 어린 황제가 잇달아 일찍 죽자 황위계승이 불안해졌다. 태후가 섭정하자 외척이 권력을 장악했다. 동한의 외척들은 서한보다 능력은 떨어졌으나 권력의 전횡은 더 심했다. 장성한 황제는 그러한 외척들에게 불만을 품었다. 황제는 어려서 자신을 키운 환관을 신임했다. 외척의 권위는 황제와 태후의 사망으로 바뀌지만, 환관은 여전히 신임황제를 측근에서 모셨으므로 정치적 기반이 더 튼튼했다.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능가하는 외척들보다 절대로 황제가 될 수 없는 환관이 더 안전했으므로, 환관의 탐욕을 눈감아 주는 대신 충성심을 확보했다. 화제 이후 계속된 환관과 외척의 권력투쟁으로 국정이 문란했지만, 후한이 망하지 않은 것은 명절(名節)을 중시하며 소임을 다한 사대부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관직에서 물러났어도 혼탁한 정치를 비평하는 ‘청의(淸議)’를 통해 건전한 기풍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영제(靈帝) 시대 환관그룹의 핵심은 장양(張讓), 조충(趙忠), 하운(夏惲), 곽승(郭勝), 필람(畢嵐), 단규(段珪), 손장(孫璋), 율숭(栗嵩), 장공(張恭), 고망(高望), 한성(韓惺), 송전(宋典) 등 12명으로 일반적으로 ‘십상시’라 불렀다. 중상시는 환관 가운데 최고의 품계로 녹봉이 2천석이었으며, 황제의 말을 외조에 전달하거나 외조에서 올린 주절(奏折)을 사전에 열람하여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와 외신들의 직접 대면을 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했다. 영제는 군주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었다. 장양은 황제의 약점을 이용해 성지(聖旨)를 조작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와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을 음해했으며, 황제에게 관직을 팔아 돈을 챙기는 즐거움을 가르쳐 주었다. 매관매직을 막아야 할 황제가 직접 매관매직을 했으니 나라가 온전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재물을 긁을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전쟁비용과 궁전수축은 단골 메뉴였다. 돈을 내지 않는 관리는 승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긁어모은 재물은 대부분 환관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들은 왕이나 제후들보다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환관의 수령인 장양과 조충을 두고 황제는 공공연히 ‘장량은 아버지고, 조충은 어머니’라고 했다.

AD 185년, 장양과 조충 등 12명의 환관이 열후로 봉해졌다. 거기대장군 황보숭(皇甫嵩)은 장각(張角)의 황건군을 토벌하러 가다가 조충의 저택을 보았다. 강직했던 그는 그것을 몰수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주절을 미리 본 조충은 장양과 함께 영제의 면전에서 황보숭이 나라의 재산을 공연히 낭비하고 있을 뿐이라고 무고했다. 영제는 즉시 황보숭을 파면했다. 게다가 조충을 거기장군으로 발탁하고 병권을 맡기는 무리수를 두었다. 조충이 논공행상을 주도했다. 견거(甄擧)는 반란평정에 대공을 세운 부섭(傅燮)을 제후로 봉하여 민심을 얻자고 건의했다. 조충은 동생 조연(趙延)을 부섭에게 보내 ‘조충과 좋은 사이로 지내면 만호후로 봉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뇌물을 바치라는 은근한 협박이었다. 부섭은 자존심이 강한 대장부였다. 그는 ‘나는 누군가에게 사사로이 은상을 부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깨끗이 거절했다. 조충은 부섭이 미웠지만 그의 명성이 워낙 높았으므로 공개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후 한양(漢陽)태수로 내쫓았다. 갑자기 십상시라는 말이 황행한다. 대통령이 그들에게 휘둘려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나라를 사유물로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십상시로 지목된 사람들도 문제이지만, 그들에게 기대어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이 많은 것이 더 문제이다. 부섭처럼 올곧은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아서 더욱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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