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고행, 봉사, 희생, 구세는 보편성을 띤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묵자는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면서 천하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자신의 생명마저 포기하며 ‘흥천하지리(興天下之利), 제천하지해(除天下之害)’라는 구세 정신을 구현하려고 했으므로 종교적 특징이 다분히 포함됐다고 할 수 있다. 장자는 묵자를 가리켜 ‘일생을 성실하게 살았으며, 죽음도 가볍게 여겼으니 그의 도는 매우 엄격했다’고 말했다. 고행정신이라는 측면에서는 가장 정확한 평가이다. 묵자는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하(夏)를 창건한 대우(大禹)를 모델로 삼았다. 대우는 친히 연장을 잡고 장딴지와 정강이의 털이 모두 빠질 정도로 모진 기후와 고난을 감내하며 치수사업을 펼쳤다. 묵자도 제자들에게 거친 베로 만든 옷과 짚신을 착용하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우를 모델로 하는 묵자의 제자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맹자는 묵자를 ‘정수리의 털이 빠지고 뒤꿈치가 닳을 정도였지만(摩頂放踵), 천하의 이익을 위해서는 하고야 만다(利天下而爲之)’라고 평가했다. 묵자의 지나침을 비판한 말이지만, 사실은 천하의 공리를 위해 헌신하는 묵자의 희생정신을 가장 잘 요약한 말이었다. 맹자의 비판으로 묵자의 명성은 더욱 빛났다. 후세의 인의지사들이 먼저 천하의 우환을 걱정하고, 나중에 즐거움을 누린다고 했던 희생정신도 묵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았다. 묵자의 희생정신은 후세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만들었다. ‘회남자 태족훈’에서는 다음과 같이 묵자의 실상을 짧지만 매우 강하게 평가했다.

“묵자를 따르는 180명은 불에 뛰어들거나 칼날을 밟아도 물러서지 않았다.”

묵가의 ‘의’는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였다. 유가가 주창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이나 사신취의(舍身取義)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구세라는 목표가 없었다면 고행과 봉사와 희생은 필요가 없었다. 전국시대 초기 사회는 격렬하게 요동쳤다. 구질서가 붕괴되고, 신질서가 수립되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해 모든 수단이 동원됐다. 제후들은 속임수를 지혜이자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묵자 사상과 실천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전개됐다. 그의 눈에 비친 기층민중의 삶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이것이 사회적 불의이다. 그는 이러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많은 학자들이 묵가와 기독교를 비교한다. 기세춘은 문익환, 홍근수 목사와 편지 토론에서 묵자의 사상이 예수보다 더 적극적이고 진보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문익환은 동의했지만, 홍근수는 예수가 묵자에 못지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기독교인 가운데 진보성이 강한 분들마저 묵자를 예수와 비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묵자의 종교성을 조금도 부인하지 않았다. 사승관계까지는 정확히 판단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지만, 시간적 의미로만 보자면 적어도 묵자를 기독교 사상의 원류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와 묵자의 교리적 유사성과 차이점을 제외하고, 두 종교의 구조적 차이를 찾는다면 교주에 대한 신격 부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서 신성을 지닌 존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원적 구조를 지녔다. 근본적으로 예수는 인간의 육신을 지닌 신으로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묵자는 인격신으로서의 하늘을 인정했지만, 자신에게 신성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사상적 원조인 묵적의 신격을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묵자라는 텍스트의 행간에는 묵적이라는 사람이 세상을 구하려는 상제의 심령(心靈)과 인간의 원죄와 세상의 고난을 기꺼이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려는 예수의 마음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의식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성부와 성자의 사명을 동시에 수행했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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