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명의 가정(嘉靖)시대에 권력을 전횡한 엄숭(嚴嵩)은 황제의 총애를 믿고 아들 엄세번(嚴世蕃)과 함께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그러나 누구도 드러내놓고 그를 반대하지 못했다. 대학사 서계(徐階)는 국가의 화근인 엄숭 부자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침착하게 준비하면서 유리한 시기를 기다렸다. 우선 그는 철저히 엄숭을 받들며 신뢰와 호감을 얻었다. 시간이 지나자 가정제는 점차 엄숭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서계는 그들과 한 패가 아니었다. 황제는 몰래 서계에게 명령을 내려 조정의 중대사를 보좌할 관리를 추천하라고 자시했다. 원위(袁煒) 등이 새로 황제의 측근으로 발탁되자, 엄숭의 당원인 오붕(吳鵬)은 파면됐다. 그러나 아직도 전체적인 세력은 미치지 못했다. 얼마 후 도어사(都御史) 추응룡(鄒應龍)이 엄세번을 탄핵했다. 뇌물을 탐하고 불법을 자행했다는 죄목이었다. 엄숭이 당원들을 동원해 엄세빈을 비호하자, 추응룡은 칼끝을 엄숭에게 직접 겨누며 엄숭이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사당을 조직하여 각종 악행을 저질렀다고 탄핵했다. 그는 만약 자신이 엄숭을 무고했다면 머리를 잘라 대나무에 매달고 사죄하겠다고 선언했다. 가정제는 그의 말을 믿고 엄숭을 파직한 후 귀가시켰다.

서계는 엄숭의 집으로 찾아가 온갖 말로 위로하면서 경계심을 풀었다. 엄숭은 몇 번이고 고맙다고 감사했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 서계는 일부러 아들을 심하게 꾸짖으며 기회를 보아 반드시 복수를 하라는 황당무계한 말을 하기도 했다. 서계가 자신이 ‘엄씨의 당원’이라는 믿음을 주려고 애를 쓴 것이 이와 같았다. 그는 남몰래 엄숭에게 편지를 보내어 동정을 살피면서 좋은 말을 계속했다. 엄숭 부자는 더욱 그를 신뢰했다. 서계는 이번에 잠시 기세가 꺾였지만 아직도 엄숭의 당원들이 곳곳에 박혀있으며, 가정제도 연민의 정 때문에 완전히 엄숭을 잘라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황제는 여전히 엄숭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를 내치지 않았다. 서계를 증오하던 엄세번은 술김에 서계의 머리를 잘라서 원한을 풀겠다고 맹서했다. 엄숭이 다시 복귀하자, 서계는 갖가지 언행으로 그를 더욱 잘 받들었다. 엄세번도 점차 원한을 풀고 다시 관사를 수축하며 재물을 갈취했다. 마침 곽간신(郭諫臣)이 공무로 엄숭의 관사에 왔다가, 공사가 벌어진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엄세번은 생트집을 잡으며 오만하게 굴었다. 곽간신은 어사 임윤(林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임윤은 엄세번이 왕처럼 행세하니 모반이나 다름이 없다고 고발했다. 엄세번은 엄중한 심문을 받았다.

서계는 비로소 엄숭 부자를 제거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미리 수집한 엄세번의 불법행위를 하나하나 거론하며 탄핵했다. 왜구(倭寇)와 내통하여 반란 음모를 꾸몄으며, 사람과 재물을 모았다고 고발했다. 또 신속히 법을 집행하여 정의를 펼쳐야 세상 사람들의 분노를 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즉시 엄세번과 그의 동지 나문룡(羅文龍)을 공개처형하고, 엄숭은 가택에서 칩거하라고 명했다. 몰수된 재산은 국고에 넣었다. 10년 동안 기세등등했던 엄숭은 철저히 궤멸됐다. 서계의 치밀한 계책이 거둔 승리였다. 서계는 정적과 한 패로 가장하고 노련하게 준비했다. 강적을 사지로 몰아넣으려면, 지혜, 타이밍, 경계심 해제라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황제에게는 모반이 가장 두려웠다. 서계는 엄숭 부자가 중국 해안을 자주 침범했던 왜구와 결탁했다고 공격했다. 과연 황제는 불같이 화를 냈다. 타이밍을 포착한 서계는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 오랫동안 명의 정권을 농간하며 갖은 악행을 저질렀던 엄숭에게도 서계라는 천적이 있었던 것이다. 간신은 시대를 막론하고 발호하지만, 심모원려로 그들을 제압하는 고수는 찾기가 어렵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