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은(殷)의 마지막 군주 주왕(紂王)은 포악하고 황음무도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혼군의 대명사이다. 주왕의 정식명칭은 제신(帝辛)이고, 주왕은 후대에 붙인 ‘잔의손선(殘義損善)’ 즉 의를 망가뜨리고 선을 손상했다는 오명이다. 그는 만년에 달기(妲己)라는 경국지색에 빠져 갖가지 포악한 짓을 하다가 나라를 말아먹었다. 달기는 성이 기, 이름은 달이다. 춘추시대 이전에는 여자는 ‘명+성’으로 불렀고, 남자는 ‘씨+명’으로 불렀다. 달기는 절세미인으로 주왕의 지독한 사랑을 받았다. 그녀의 관심을 받으면 명예와 부귀를 누렸고, 그녀의 미움을 받으면 죽고 말았다. 주왕은 음탕한 음악과 비속한 춤을 즐겼다.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으며, 녹대(鹿臺)에 비축된 돈과 거교(鉅橋)에 저장된 곡식을 탕진했다. 개와 말을 기르고 진귀한 보물을 수집하여 궁정을 채웠다. 사구(沙丘)에 화원과 누대를 확충하고 날짐승과 길짐승을 풀어놓았다. 연못을 파고 술을 채워 넣었으며, 고기를 숲처럼 잔뜩 걸어놓았다. 남녀가 옷을 벗고 서로 쫓아다니며 밤이 새도록 놀았다. 이른바 주지육림이다. 형벌은 더욱 가혹해졌다. 대표적인 형벌이 포락형이다. 구리로 만든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석탄으로 달군 다음 범인에게 그 위를 걷게 한다. 발을 디딛는 순간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달기에게는 음악이었다.

제신은 30세에 즉위했다. 당시 은왕조는 웅혼한 국력을 자랑했다. 혈기방장한 제신은 맨손으로 맹수를 죽일 정도였으며, 탁월한 언변과 예민한 음악적 감수성을 지녔지만, 미색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자만심이 더욱 강하여 토지가 비옥한 동남방으로 세력을 떨치려고 했다. 60세에 유소씨를 정벌한 후 얻은 전리품 가운데 하나가 달기였다. 늙은 제신은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반했다. 제신이 달기를 얻었을 때 은의 국력은 정점이었다. 새로운 도성이 풍광과 기후가 적당한 조가(朝歌)에 건설되었다. 전쟁터에서 일생을 보낸 제신은 달기의 아이디어대로 놀아났다. 이 무렵 섬서의 서쪽 위수(渭水) 유역에서 주(周)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문왕 희창(姬昌)의 시대가 되자 인정(仁政)에 주력하여 국력이 날로 융성해졌다. 부근의 부족들을 제압하고 황하를 따라 내려와 조가를 압박했다. 희창의 장남 백읍고(伯邑考)는 인질이 되어 제신의 어가를 담당하다가 제신의 분노를 사서 솥에 삶겨졌다. 제신은 고깃국을 희창에게 먹이고 2년 동안 유리옥(羑里獄)에 가두었다. 신하들이 뇌물을 바쳐 간신히 석방되었다. 주와 은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수도를 기(岐)에서 위수의 남쪽 풍(豊)으로 옮겨 군사력을 강화한 주가 선전공세를 전개하면서 달기와 제신에게 오명이 덮이기 시작했다. 달기는 교만, 사치, 음란한 요부이자, 뱀이나 전갈과 같은 악랄한 독부가 되었고, 제신은 큰 공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들의 생명을 돌보지 않으며 잔혹하고 혼음한 폭군으로 여자의 말이나 듣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BC 1056년, 문왕이 죽고 차남 희발(姬發)이 계위했다. 그가 무왕이다. 무왕은 동생 주공단(周公旦)과 태공망 여상(呂尙)의 도움으로 제신의 형 미자가 이끄는 은의 대군을 목야(牧野)에서 대파했다. 제신은 분신자살하고 달기는 사로잡혔다. 주는 정치발전과 사적인 원한을 일치시키기 위해 달기를 추악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정치적 수단에 불과했다. 은의 멸망 원인은 동남방 경영에 과도한 국력을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주력부대가 장강 하류의 경영에 몰두하자 중원은 빈 곳이나 다름이 없었다. 주는 그 틈을 이용했다. 대국의 멸망을 한 여인에게 미루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옳지 않다. 궁으로 들어온 달기는 다른 비빈들과 총애를 다투었기 때문에, 밀린 비빈들의 씨족들이 불만을 품고 제신에게 반발했다. 소국의 제후들과 제신 사이에 충돌이 자주 발생했다. 억지로 달기를 경국지색이라 부르는 것은 그녀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했을 뿐이다. 주왕은 부호화된 폭군이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마저 주왕의 악행은 너무 심하게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도화는 온유한 자태를 묘사할 수 없고(桃花難寫溫柔態), 작약은 얌전한 아름다움으로 그려내지 못한다(芍葯堪如窈窕娟)’라는 시가 있다. 글이나 그림으로 본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국가의 흥망이 한 사람에게 달렸다는 생각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 단견이다. 하물며 한 여인 때문에 나라가 망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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