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한산사(寒山寺)는 옛 소주성에서 서쪽으로 십리 정도 떨어진 풍교고진(楓橋古鎭)에 있으며, 불교가 극성을 부리던 양(梁)의 천감(天監)연간에 건설됐다. 이 일대는 작은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 대평원이다. 일반적으로 절은 산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산사는 수많은 물길 사이에 얌전히 앉아 있을 뿐이다. 당대의 시승 한산자(寒山子)와 습득(拾得)이 이곳에서 노닐었다. 대웅전을 돌아가면 한습전(寒拾殿)이 있고 그 안에는 연꽃 한 송이를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는 한산자와 묵묵히 귀담아 듣는 습득의 조상이 있다. 사이가 좋기로 소문난 까닭은 한 사람은 말하고 한 사람은 듣기만 했기 때문이다. 조용히 바라보면 말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의 표정이 행복해 보인다.

이곳에는 볼거리가 많다. 건물로 눈에 띠는 것은 보명보탑(普明寶塔)이다. 5층의 수려하면서도 단조로운 목조건물인 이 탑은 3층까지 개방이 되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소주 시내가 널리 보인다. 3층에 올라가서 주변을 돌아보니 한겨울인데도 대나무 숲에서 푸른빛이 돌아서 남방의 정취가 느껴지고, 사찰의 뒤를 흐르는 운하를 따라 특유의 2층식 주택들이 늘어섰다. 한산사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긴 회랑에 연이은 비석들이다. 가장 여러 사람이 남긴 글은 역시 한산사를 유명하게 만든 당의 시인 장계(張繼)가 남긴 ‘풍교야박’이라는 칠언율시이다. 풍교(楓橋)는 한산사 주변을 흐르는 운하에 놓인 다리이다. 이 시는 한산사의 종소리와 수국(水國)의 달밤이 주는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가장 절묘하게 표현했다고 하여 널리 사랑을 받았다.

월락오제상만천(月落烏啼霜滿天), 강풍어화대수면(江楓漁火對愁眠).
고소성외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 야반종성도객선(夜半鐘聲到客船).
달 지고 까마귀 소리 들릴 제, 찬 서리 하늘에 가득,
강교와 풍교에 댄 어선이 마주보며 시름에 겨워 졸고 있네.
고소성 밖 한산사 한밤중을 알리는 종소리 객선까지 들리누나.

중국사상 가장 화려했던 당대에도 한산사는 수많은 묵객들이 즐겨 찾았다. 장계가 이 시를 지은 후 많은 사람들이 초저녁부터 배를 타고 놀다가 밤이 깊으면 다리에 배를 대고 한산사의 종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어선에서 비친 불빛이 물결에 따라 흔들리니 조는 것 같다. 절묘한 감흥에 젖은 이태백은 아무리 시를 지르려고 해도 머릿속에서 장계의 풍교야박이 맴돌았다. 결국 그는 붓을 던진 대신 풍교야박을 읊조렸다. 이태백은 시를 지으면 절창이었지만, 시를 짓지 않아도 더 절창이다.

이후로 묵객들은 시를 짓는 것보다 붓을 들어 풍교야박을 적고 비석에 새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다양한 사람들의 글씨를 감상하는 것도 풍교야박을 읽는 기쁨이다. 유월(兪樾)의 글씨는 매끄럽고 부드러워서 사랑하는 여인과 마주앉은 느낌이고, 유해속(劉海粟)의 글씨는 호랑이의 걸음처럼 웅혼하여 지기와 천하지대사를 논하는 것 같고, 진운(陳雲)의 글씨는 취흥이 도도한 일필휘지이다. 문징명(文徵明)의 글씨는 가을날 계곡물처럼 청량하고, 중국공산당의 창시자 이대쇠(李大釗)의 글씨는 자유분방하면서도 고집스럽다. 장계의 자서는 사랑하는 연인들이 정에 겨워하는 것 같고, 전태초(錢太初)의 전서는 나란히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 같고, 화인덕(華仁德)의 글씨는 새색시가 남편을 기다리며 조바심하는 것 같다. 사람의 본능 가운데 자신이 이 세상에 왔다간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도 만만치는 않다. 그렇다고 아무 것이나 남기면 보기 싫은 낙서가 되고 만다. 재주가 많아 무엇인가 남기려다가 그것을 억누르며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존중한 사람들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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