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만석군(萬石君)(3)

만석군 가족의 행동은 감히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실행이었으며 온 나라 안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나라에까지도 평판이 자자한 모범이 됐다. 꾸밈없이 진실한 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제나라와 노나라 출신의 유학자들까지도 이 만석군의 일가에게는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만석군은 원삭 5년(기원전 124)에 세상을 떠났다. 큰아들 건은 통곡하며 아버지를 너무나 그리던 나머지 지팡이에 의지하며 겨우 걸을 정도로 여위고 지쳤었다. 그 때문에 1년이 지나자 석건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죽었다.

만석군의 아들이나 손자들이 모두 효도를 다했으나 그중에서도 석건은 아버지 이상이었다. 건이 낭중으로 있을 때 상소문을 천자에게 올린 일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 상소문이 반환되었다. 건은 그것을 다시 읽어 내려가던 중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자가 있었구나, 마(馬)라는 자는 마지막 최후의 획까지 더해서 다섯 점이 되어야 하는데 네 점밖에 없다. 폐하의 꾸짖음이 있으면 죽음으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는 석건의 몸가짐은 만사에 있어 이런 식이었다.

막내아들 경이 태복으로 있을 때였다. 황제의 마차를 끌고 궁궐을 나간 일이 있었다. 황제가 경에게 물었다. “지금 마차를 끌고 있는 말은 몇 마리요?”

석경은 채찍으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이렇게 세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여섯 마리입니다.”

만석군의 아들 가운데 경이 제일 시원스러웠다. 그런데도 그 정도였다.

그가 제나라 재상이 되어 부임하자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의 가풍을 존중했으며 나라는 자연히 잘 다스려졌다. 뒤에 제나라 사람들은 석상사를 세워 석경을 제사지냈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에 무제는 태자를 세워 군신들 가운데에서 태자태부의 적임자를 뽑았는데 결국 석경이 뽑혀 패군의 태수에서 태자태부로 영전됐다. 그로부터 7년 뒤에 다시 어사대부에 임명됐다.

원정 5년 가을. 다시 승상이 죄를 지어 파면되고 어사대부 석경에게 다음과 같은 조칙이 내려졌다.

‘만석군은 선왕 대에 중용된 자이며 그 아들과 손자도 효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어사대부 석경을 승상에 임명하고 목구후에 봉한다.’

이 시기의 한나라는 내외적으로 다사다난했다. 남쪽으로는 민월, 남월을 멸망시키고 동쪽으로는 조선을 공격하며 북쪽으로는 흉노를 쫓아내고 서쪽으로는 대원을 토벌하고 있었다. 또한 천자의 순행이 행해지고 낡은 사당이 수리되고 봉선의 의식이 행해졌으며 예악이 부흥되었다. 그 때문에 국고는 메말랐고 조정은 그 대책으로 분주했다.

상흥양 등은 재정을 바로잡는 데 힘쓰고 왕온서 등은 법의 적용을 엄격히 하고 아관 등은 학술 진흥책을 추진했다. 그들 모두 구경에 속하며 교대로 정책을 실시하고 승상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렸으므로 승상 석경은 공손하고 부지런하기만 했지 재직 9년 동안 별로 한 일이 없었다.

한 번은 무제의 측근인 소충과 구경인 함선에 대한 탄핵을 석경이 주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벌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무고죄로 벌금을 무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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