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가을산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은 장관이다. 그 장관이 사람들을 불러내어 가을산은 ‘인산인해(人山人海)’가 된다. 산에 가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한가득 꽉 채운 가방을 등에 메고, 단풍 색깔만큼이나 울긋불긋한 행장을 차려입는다. 그래서 가을 산은 인산인해로되 울긋불긋한 인산인해가 된다. 사람은 자연에 파괴의 흔적을 남기기 쉽다. 그 파괴의 흔적만 남기지 않는다면 가을산은 사람과 대자연의 조화와 교감이 이루어지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의 화려한 야외무대가 돼준다.

단풍의 색깔은 여러 가지다. 붉은 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란색, 갈색 등도 있다. 미세한 색깔까지를 따진다면 단풍의 종류는 육안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식물학자들이 설명하는 단풍의 원인은 이렇다. 날씨가 차가워지면 봄과 여름에 나뭇잎을 짙푸르게 하던 엽록소(chlorophyll)는 분해돼 사라진다. 대신 엽록소를 도와 광합성을 돕던 보조 색소들이 존재를 드러내어 나뭇잎을 여러 색깔로 물들이게 된다. 그것이 단풍이다.

그러니까 안토시아닌(anthocyanin) 색소는 나뭇잎을 붉게, 카로티노이드(carotenoid)는 적황색으로, 타닌(tannin)은 거무죽죽한 회갈색으로, 크산토필(xanthophyll)은 은행잎처럼 샛노랗게 나뭇잎의 색상을 변하게 한다. 나무에 따라 이런 성분들이 섞이는 양과 비율이 다르므로 단풍의 종류는 사실상 다 구분해낼 수 없다. 그것은 신비의 영역이다. 식물학자들의 설명은 물리적 인과의 설명과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그 같은 형이하학(physical science)으로 설명이 안 되는 고도의 지적 영역을 탐구하기 위해 형이상학(metaphysics)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도 세상이치를 다 규명해내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사람의 일생을 자연의 4계(四季)로 구분해본다면 아마 백발(白髮)이 돋는 때가 자연의 가을 쯤이 될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백발이 돋는다는 것은 인간 본체(本體)의 노쇠와 조락(凋落)을 의미한다. 일단 늙어 백발이 돋은 사람에게 한 번 간 홍안청춘(紅顔靑春)의 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첨단 과학의 산물인 줄기세포(stem cell) 요법의 효험이 뛰어나다 해도 그 효험은 부분적인 것에 그친다. 노쇠한 인간을 통째로 젊은 시절로 되돌려놓을 수는 없다. 사람의 입장에서 인간의 노쇠는 슬픈 일이로되 그것을 섭리(providence)로서 의연히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여 거부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아무 소용도 없다.

아무튼 인간 4계의 가을에 돋는 것이 백발이라면 그 백발은 얼핏 자연 4계의 가을 나뭇잎이 물들어 시드는 단풍에 비유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백발은 인간 본체의 노쇠 현상이지만 가을 단풍은 그것처럼 결코 나무 본체의 노쇠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가운 날씨에 나뭇잎은 시들어도 나무 본체는 연연세세(年年歲歲) 멀쩡하다. 단풍이 낙엽으로 져 벌거벗은 나목(裸木)이 될 때 나무 본체가 죽어가는 것처럼 보일 뿐 썰렁한 가을, 혹한의 겨울만 지내고 나면 다음 봄과 여름에는 다시 파란 싹이 돋고 짙푸른 녹음을 뽐내게 된다. 충분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비법은 바로 단풍 현상에 숨겨져 있다는 탐구적 설명은 그럴 듯하게 들린다.

단풍이 낙엽으로 져 나무 본체의 뿌리 위에 두둑이 쌓이면 땅과 땅 속 수분의 결빙(結氷)을 막아 매서운 추위로부터 본체를 보호한다. 또한 썩으면 거름이 된다. 그래야 그 자리에 떨어지기도 하고 멀리 흩날리기도 하는 씨를 통해 종(種)을 번식할 수 있게도 된다. 그에 앞서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는 현상은, 우기가 지나 수분이 적어지는 때가 되면 생기발랄한 잎으로서의 활발한 수분 섭취와 수분의 증산(蒸散)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줄여주기 위해 시들고 떨어져 본체의 생명력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은 전개된다.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자연의 계절 변화와 그 변화에 따른 나무 본체와의 사이에 벌어지는 생태적 적응을 위한 장군 멍군이며 도전에 맞서는 신비한 응전인 것은 틀림없다. 그것을 마치 인간의 감정과 이성을 그대로 이입(empathy)해 설명하려 한다면 부자연스런 작위의 냄새가 풍겨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인간도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므로 어느 쪽에서든 발현(發現)되는 현상의 이치가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그럴 듯한 설명으로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나무의 단풍에 대한 그럴 듯한 설명에 비한다면 사람의 백발에 대한 설명은 한참 부족하다, 그처럼 사람에게는 정작 인간 자신에 대한 탐구가 모자란다. 백발은 사람이 충분히 잘 먹고 잘 마시면서 살았거나 아니거나 아무도 피해가지 않는다. 앞으로 살 날 동안 먹고 마실 것이 풍족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백발은 때가 되면 누구에게나 찾아와 돋는다. 사람의 삶이 평등한 것만은 아니지만 사람의 백발과 노쇠에 있어서만은 인간은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단풍과(科)의 수목은 생태환경이 어려워질 때 단풍과 낙엽을 내어 그 세월을 이긴다. 그렇지만 인간의 백발은 가는 세월에 무너지는 인간의 모습과 패배의 절대적 평등을 상징할 뿐이다. 허망한 것이 인간이며 인생인 것이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세한지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之然後 知松柏之後凋)’. 공자가 이런 말을 했다. 이 말은 조선조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세한도(歲寒圖)를 그리면서 인용해 썼다. 그 때가 완당이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째, 59세 때로 중앙정치 무대에서 잊히고 지인들마저 등을 돌렸을 때다. 하지만 제자이며 역관인 이상적(李尙迪)이 중국에서 귀한 책자를 선물로 사들고 불원천리 찾아온 의리에 감동해 세한도를 그리고 이 글귀를 써넣었다. 수목에는 단풍이 드는 단풍과 나무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소나무 잣나무처럼 사철 푸른 상록수도 있다. 어느 쪽이나 인간의 편의대로 호오(好惡), 선악(善惡)의 잣대로 볼 것은 없다. 인간은 인간이고 자연은 자연이다. 인간과 자연이 뒤섞이고 또한 그것들이 뒤섞여 조화를 이룬다. 가을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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