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빈 장로교 역사  ⓒ천지일보(뉴스천지)
칼빈, ‘주석의 왕자’… 개혁 명분으로 ‘인권유린’ 일삼아
세계 장로교인 중 1/3 한국교회에 몰려, 이단논쟁 극심

[천지일보=송태복 기자] 한국교회 어딜 가나 간판에는 ‘~장로회’라는 이름이 걸려있다. 장로교 간판이 아니면 이상한 교회로 오해할 정도다. 한국에서 장로교의 유세는 대단하다.

2014년 현재 개신교 연합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소속 71개 교단 중 56곳(78.8%), 한국교회연합(한교연) 소속 38개 교단 중 33개(86.8%)가 모두 장로교다. 2011년 기준 문광부에 등록‧미등록한 개신교단 232곳 중 180곳(77.5%)도 모두 장로교가 주류다.

이렇듯 장로교가 득세하다보니, 장로교를 창시한 ‘칼빈’에 대해서는 ‘대단한 신학자’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몇 년 전에는 강남에 ‘칼빈로’를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됐을 정도다. 그러나 칼빈에 대한 이런 추앙분위기는 장로교가 우세한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예외적 현상이다.

세계적으로 장로교 인구가 매우 미미한 데다 칼빈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마녀사냥’을 일삼은 장본인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실제 칼빈이 창시한 장로교가 번성했던 시대와 지역마다 ‘마냥사냥’이 자행됐다는 것은 기독교사의 암울한 진실이다.

◆종교개혁 부르짖은 칼빈 장로교 실체
16세기 초 죽은 사람의 죄까지 사해준다는 ‘면죄부’ 판매는 로마 가톨릭교회 부패의 극단을 보여줬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외친 루터 지지자들은 독일과 북유럽 등으로 퍼졌고, 10여 년에 걸친 투쟁 끝에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정식 종교로 인정받아 프로테스탄트교회, 즉 지금의 개신교가 됐다. 초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장로교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칼빈의 제자 존 녹스(J. Knox, 1513∼1572)가 스코틀랜드로 건너와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을 전파하면서 장로교파로 자리 잡았다.

장로교 창시자인 칼빈((J. Calvin, 1509∼1564)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보다 20년 늦게 프랑스 노용(Noyon)에서 서기관이었던 제라르 칼빈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여곡절 끝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국이라는 특별기구의 수장으로 재임했다.

칼빈의 교리 중 가장 대표적인 예정론을 보면 “영생이 예정된 자가 다시 영멸로 예정되거나 영멸로 예정된 자가 다시 영생으로 예정되는 변동은 없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구원 받을 사람도 벌 받을 자도 이미 정해져 있어서, 선택된 자가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용서가 된다는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주석의 왕자’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수많은 주석을 쓴 그는 신약의 예언서인 요한계시록만은 해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계시록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536년 27세의 나이에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칼빈은 장로교회 통치제도를 발전시켰다.

◆‘마녀사냥’ 일삼은 칼빈주의자, 목적은 ‘돈’
칼빈은 출판업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자 혀를 잘라 죽이고 자신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는 등 이른바 ‘마녀사냥’을 자행했다. 당시 인구 1만 6000명에 불과한 제네바에서 칼빈이 사형시킨 공식 인원만 58명이며 추방한 인원도 76명이나 됐다.

그러나 칼빈 추종자들이 저지른 ‘마녀사냥’까지 포함하면 칼빈에 의한 피해자는 수천 명에 이른다. ‘유럽의 마녀사냥’의 저자 브라이언 레벡(Brian P. Levack)에 의하면 ‘칼빈사상이 지배하던 스위스에서는 8800명 이상의 여성이 마녀로 재판을 받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국이나 스코틀랜드, 그리고 스위스에서 자행된 마녀사냥의 큰 목적 가운데 하나는 경제적인 이득과 무관치 않다. ‘마녀재판으로 이득을 본 사람은, 누가 마녀인지를 알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던 마녀 사냥꾼이었다’는 레벡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마녀로 결론나면 피의자 재산은 몰수 됐고, 돈은 대부분 재판관의 보수로 지급되거나, 간접적으로 법원관리에게 지급됐다. 실제 유럽의 마녀사냥은 마녀사냥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없을 때야 끝을 맺었다.

◆영국 청교도 미국 이주와 인디언 탄압
유럽의 종교개혁기에 영국 성공회 신도 일부는 칼빈 신학을 받아들여 성공회에서 벗어나 청교도라는 세력을 형성했다. 청교도라는 명칭은 당시 개혁파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가톨릭 성직자들의 화려한 의복 등에 반발해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배의 순수성(Purity)을 강조하는데서 비롯됐다.

청교도는 영국 시민전쟁 때 크롬웰(Oliver Cromwell)을 지지하고 그를 교인으로 만들었다. 전쟁에 승리한 크롬웰은 찰스 1세 왕을 교수형에 처하고, 크리스천들이 호화스럽게 즐기는 크리스마스를 불법화했으며, 영국 전체에 화려한 색깔과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금지하도록 했다.

다시 말해서 칼빈주의 장로교 즉 청교도가 통치하는 영국을 만들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스튜어트 왕가에 의해 다시 왕정이 복구되자 그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영국인들은 청교도를 몹시 증오하며 일종의 보복으로 많은 청교도를 처형했다. 이 청교도들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오늘날 미국의 기초가 됐다.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왔으나, 자신들이 받았던 서러움을 망각하고 신대륙에서 다른 사람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유럽에서 이미 끝난 마녀사냥을 시작했다. 이단이기 때문에 마녀이고 마녀이기 때문에 이단이란 식으로 사람을 잡아 처벌했다.

예를 들어 1657년 10월 14일자로 보스턴 법정에서 공표된 한 법조문 일부를 보면 아래와 같다. ‘첫 번째로 잡힌 남자 퀘이커는 귀를 하나 자르고 자비로 형무소에 보낼 것이며, 두 번째로 잡히면 나머지 귀를 마저 자른다’는 등의 무자비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인디언의 호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식량과 사냥감을 얻기 위해 인디언 마을을 약탈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무력을 이용해, 거래(혹은 조약)에 도움이 되는 부족 지도층을 교묘히 빼돌려 강제조약을 공표한 뒤 살해하거나 강압적으로 조약을 체결한 뒤, 저항하는 인디언들을 학살하는 방식을 취했다.

청교도 목사들은 인디언이 사단의 아들이라는 말로 인디언을 학살하도록 부추겼다. 인디언 학살과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노예제도는 숭고한 청교도정신으로 미국을 건국했다는 미국 건국 역사 뒤에 숨겨진 진실이다.

◆美장로교에 뿌리 둔 한국 장로교와 신사참배
한국 장로교의 선교 역사는 1884년 9월 북미 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 安連, 1858∼1932)이 인천에 도착한 날로부터 기산한다. 그의 뒤를 이어 1885년 4월에 언더우드(H.G. Underwood, 1859∼1916)가 다시 선교에 힘쓰기 시작했다.

장로교는 의료 선교와 학교 교육에 기여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1912년 9월 1일 평양에서 창립된 장로교 총회에는 총대목사, 장로, 선교사 등 221명이 참석했다. 이 때 언더우드가 총회장에 선출되고, 회계직의 블레어(W. N. Blair) 이외의 모든 임원직은 한국인 총대가 맡았다. 1925년 당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수적 비율은 3대 1 정도였다.

1938년 장로교 총회는 서울 종로경찰서 형사 89명의 임석 아래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몇몇 총대의 항의도 있었지만 결국 신사참배를 신민(臣民)으로서의 적성(赤誠)으로 한다고 결의해 한국교회사에 씻지 못할 오점을 남긴다. 이때부터 도처에서 전향의 성명이 발표되고, 교회당은 가마니 공장, 심지어 헌병 파견대로 징발되기도 했다. 결국 신사참배는 한국 장로교 분열의 단초가 됐다.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사한 목회자와 신도 50여 명이 해방 후 감옥에서 나와 고신파(高神派)를 만들어 독립했다. 이어 신학 방법론의 문제 때문에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의 분립, 그리고 WCC가입을 놓고 용공(容共)시비가 일어 통합(統合)예수교 장로회와 합동(合同)예장과의 분립이 1959년에 진행됐다.

1989년 장로교 중심의 개신교연합기관인 한기총이 발족했지만 출범 이후 이단논쟁과 비리로 논란이 지속됐다. 한기총 내 이단논쟁은 2012년 한교연 분리, 2013년 고신 탈퇴, 2014년 예장합동 탈퇴까지 불러 한기총은 개신교 대표연합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완전히 잃은 상태다.

◆한국, 칼빈 마녀사냥 재연… 장로교 실체는 ‘미미’
장로교가 종교개혁기에 각국에 쉽게 정착했던 이유 중 하나는 사치스런 가톨릭에 반해 엄격한 통제를 보여주는 외형적 모습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특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적 독단이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자행된 마녀사냥이 ‘돈 벌이 수단’이었음이 드러나 오히려 쇠태의 원인이 됐다.

한편 역사적으로 칼빈 장로교가 성할 때마다 마녀사냥이 성했던 것처럼 한국도 장로교가 주류교단이 되면서 이단논쟁뿐 아니라, 과거 마녀사냥을 보는 듯한 인권유린도 심각하게 빚어지고 있다.

한기총이 이단으로 지목한 교단 신도들이 폭로한 한기총 소속 목회자들의 대표적인 인권유린은 ‘강제개종교육’으로 납치, 폭력, 감금, 정신병원 수용 등 칼빈의 망령이 되살아난 듯한 행태를 보인다. 그러나 한기총과 각 개신교단은 ‘이단을 몰아낸다’는 명분 아래 ‘강제개종교육’에 사실상 동조하고 있다.

국내에선 여전히 기세등등한 장로교가 실제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통계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OMSC)가 발행한 ‘2013년 세계선교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는 장로교 인구는 약 1800만 명으로 세계 인구의 0.25%, 전체 개신교인 중에서도 3.4%에 불과하다.

2005년 한국 통계청 기준 전체 개신교인이 860만 명 중 국내 장로교인이 약 6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점을 고려하면 전 세계 장로교인의 삼분의 일이 우리나라에 몰려있는 셈이다. 그러나 미국(350만 명)과 한국(600만 명) 중심으로 교세를 형성한 장로교는 배타적인 특성이 반발을 불러 교세가 약화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성장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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