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주필)

 
깊어지는 가을에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를 무심히 들을 만큼 무심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왜 저렇게 목청이 찢어질 듯 울어대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귀뚜라미는 귀뚜라미끼리는 알아듣는지 모르지만 그저 울어댈 뿐이다. 사람이 사람의 일에 대해 하듯이 꿈보다 해몽이 좋기 마련인 해설 같은 것을 귀뚜라미가 할 리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귀뚜라미 소리를 슬프게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기분일 뿐이다. 정작 귀뚜라미가 슬퍼서 내지르는 소리인지, 살아 있음에 대한 희열의 표시인지, 짝을 갈구하는 소리인지 귀뚜라미에 묻는 사람도 없지만 물어봐도 소용이 없을 것이므로 사람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귀뚜라미 소리에 인간의 감정을 이입(移入)해서 맘대로 해석하는 ‘감정 이입의 오류(Empathy fallacy)’ 또는 ‘유정화의 오류’를 범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주인은 당연히 자신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제멋대로다.

귀뚜라미는 가을을 보내는 인류와 피(被)창조물로서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생명체가 아닌가 싶다. 귀뚜라미가 사람보다 먼저 태어났다고 우길 생각은 없지만 사람의 가을은 귀뚜라미가 있어 감성을 샘솟게 하는 계절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렇기에 만약 가을마다 듣던 귀뚜라미 소리가 없는 가을은 사람에게 가을이 가을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을로서의 결격사유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올 가을 풀밭에서, 창가에서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유난히 슬프다. 또르르… 또르르… 뚜르륵, 뜨르륵, 또르르… 왜 그리 슬프게 울어 대는가. 전혀 그렇다고 인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 소리가 슬프다고 느껴지는 것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나이가 깊어진다는 증거인가.

두보(杜甫)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장기근의 편저 ‘두보’). 원제는 ‘촉직(促織)’이다. 귀뚜라미를 재촉할 촉(促)에 직물(Textile) 직(織) 자를 써서 촉직(促織)이라 한 것은, 새김 그대로 귀뚜라미 울음이 겨울옷을 빨리 마련하라고 재촉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편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귀뚜라미 소리는 가을 한 철로 끝이어서 겨울에는 더는 들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울음이 가을을 구가하는 것임은 분명할 것이지만 가을이 곧 끝날 것임을 알리는 경고이기도 한 것을 가을 한 철로 끝나는 그 울음 자체가 웅변한다. 어떻든 시는 이렇게 풀려 나간다.

‘조그맣고 가냘픈 귀뚜라미
슬픈 소리 이렇게 사람을 울리는가
풀뿌리에서 오들오들 울다가도
침상 아래서 정답게 속삭이는데
오래된 나그네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고
버림받은 아낙 새벽까지 견디기 어려워라
애절한 거문고나 격렬한 피리 소리도
네 천진한 소리의 감격에는 비기지 못하리’
(촉직심미세/애음하동인/초근음불온/상하의상친/구객득무루/고처난급신/비사여급관/감격이천진; 促織甚微細/哀音何動人/草根吟不穩/狀下意相親/久客得無淚/故妻難及晨/悲絲與急管/感激異天眞)

화폭에 담은 백두산 천지의 그림이나 필설(筆舌)의 설명이 어떻게 이 실제의 위대한 자연인 천지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는가. 만년설로 뒤덮인 히말라야, 몽블랑, 킬리만자로, 빙하가 휩쓸고 간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전설의 유토피아 샹그릴라가 존재한다고 일컬어지는 티베트 고원의 창공보다 더 푸른 호수를 사람의 솜씨로 어떻게 그림이나 글로 흉내낼 수 있는가.

자연은 글자로 쓰여지지 않은 무자서(無字書), 줄 없는 거문고인 무현금(無絃琴)이다. 그러니까 자연은 진실만을 가르치는 비길 데 없이 위대한 교사(敎師)이며 최상의 감동을 주는 참 예술 그 자체다. 사람은 겨우 알량한 솜씨로 자연의 그것을 어설프게 모사(模寫)해 돈 벌이도 하고 유명해지기도 하지만 오만이 분수를 뛰어 넘는다. 두부의 표현대로라면 귀뚜라미는 비록 조그맣고 가냘프지만 나그네를 울리고 버림받은 아낙의 새벽을 힘들게 하는 위대한 자연의 일부분으로서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두말 것 없이 두보 자신도 그 작은 귀뚜라미 소리의 위력에 뭔가는 매우 처연해졌던 것 같다.

세상이 너무도 시끄럽다. 남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삿대질부터 해댄다. 내 탓보다는 남 탓이며 내 잘못을 성찰해보기보다는 남에 대한 비난과 원망, 증오를 내보인다. 그것의 앞장은 정치인들이 선다. 정치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전제군주 시대나 민주주의 시대나 다름이 없다. 그 같이 세상을 지배하는 정치의 주인공들인 정치인들이 찢어져 싸우니 덩달아 세상이 찢어지고 갈등으로 들끓는다.

거기다 대한민국이기에 잘 먹고 잘 살며 자유를 누리는 처지이면서 이 나라를 파괴하려는 사람들까지 날뛴다. 마치 사냥꾼이 ‘위장 말(Stalking horse)’의 가면을 쓰고 사냥감에 접근하는 것처럼 그들의 진상은 자칫 현혹될 만큼 그럴 듯하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 드러났다. 더는 국민을 못 속인다. 한 사람은 영원히 몇 사람은 한동안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은 결코 오래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이 가을에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라. 그리고 진솔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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