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뭐야? 내가 노래에 소질이 있나?’

그 후로 한국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봉제공장을 다니던 큰 누나가 녹음기가 딸린 전축을 사와서 한동안 노래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한국은 막내아들인데도 오빠란 말이 들어간 이 노래를 18번으로 즐겨 불렀고, 그밖에 목포의 눈물’ ‘누가 울어등의 주로 슬픈 노래를 좋아했다. 집에서 1.5쯤 떨어진 학교에 갈 때에는 아예 작사와 작곡까지 해대며 흥얼거리곤 했다.

세상의 설움 중에 세 가지는 첫째가 배고픈 설움이요, 둘째가 집 없는 설움이며, 셋째가 나라 없는 설움이라지만, 한한국은 어렸을 때 첫 번째인 배고픈 설움을 가장 많이 겪었다. 가난한 흥부집에 자식새끼만 주렁주렁 달린 것처럼, 한한국의 집 역시 두세살 터울로 53녀가 줄줄이 사탕으로 엮어졌으니 식사 때는 그야말로 생존경쟁이 치열했다.

얘들아, 밥 묵고 싶으면 쳐묵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거라잉!”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다놓으면 이렇게 한 마디만 하시고는 두번 다시 채근하지 않으셨다. 8남매는 어디에 있다가도 어머니의 그 한 마디에 쏜살같이 모여들었다. 지금의 그는 아내 윤소천 시인이 식사 준비를 해놓고 열두 번을 불러야, 평화지도를 그리다가 붓을 놓고 마지못해 식탁에 오는데 말이다.

와아, 갈치 구웠다! 이건 내 거야! 퉤퉤!”

어쩌다가 갈치구이가 밥상에 오르면 욕심 많은 형들이 침을 퉤퉤 뱉으며 독점을 하려 했다.

뭐야? 그럼 이쪽은 내 거! 퉤퉤!”

또 다른 형이 갈치를 뒤집어 침을 뱉으려고 하자, 이번에는 작은누나가 잽싸게 갈치구이 접시를 뺏어 들고 부엌으로 나가며 약을 올렸다.

그럼 난 씻어다가 먹지롱!”

한국의 집에서는 여름엔 완전한 꽁보리밥, 겨울엔 점심은 아예 거르거나 고구마 찐 것 한 개를 얻어먹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으이구, 얘들아! 밥 타령은 그만하고 여기 된장국 많이 끓였으니 이걸루 배채워라잉! 된장국은 귀신도 환장헌당께!”

한국이 체해서 배가 아플 때면 어머니는 그날 저녁에 무꾸리라는 걸 하는데, 먼저 됫박에 쌀을 가득 담아 보자기에 싸서 누워 있는 한국의 배를 문지르며 사설을 읊는다.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 어리 567번지에 사는 한씨 대주의 막내가 이처럼 배가 아프니, 만약에 거리의 잡귀가 들었다면 이 됫박 한 쪽을 폭 파먹어 자취를 보이거라! 어서 썩! 한 입 베어 먹으면 된장국 푸짐하게 끓여 줄 테니께!”

그러면서 한국의 배에 몇 번 더 문지르면 정말로 됫박 한 쪽이 움푹 파여 잡귀의 흔적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됫박에서 그 부분의 쌀을 떠내어 가마솥에 된장을 풀어 끓여서는, 부엌 바가지에 퍼들고 식칼을 든 채 뒷간 앞에 된장국을 냅다 쏟았다. 그런 다음 거기에 식칼로 열십자를 긋고는 식칼을 콱 꽂으며 이렇게 엄포를 놓는 것이었다.

어이! 이제 잡귀는 흥건한 된장국으로 풀어줬으니, 어서 먹구 뒤돌아보지 말구 썩 물러가거라잉! 천리만리 네가 온 곳으로 썩 돌아가렸다!”

이때쯤이면 한국의 뱃속엔 뱀 한마리가 숨은 듯 꾸물꾸물 기어나가다가 뿌웅! 푸시시! 하고 방귀가 나오면서, 그토록 아프던 배가 씻은 듯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한한국이은집 공저

▲ ●작품명: 한반도평화지도 ‘통일’ ●작품크기: 가로 4m 50㎝ x 세로 7m ●제작기간: 1995~1999년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