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넝쿨, 가을
오태환(1960~ )
수수밭 쓰러지듯 붉게 쓰러지는 가을 저녁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민병대 한 무리가 일렬로 행군을 한다 AK 소총을 들고 나귀 고삐를 잡고 박격포를 메고 어린것들을 수레에 태우고 죽창을 가누며
붉은 별의 능선을 오른다
대장정, 또는 혁명의 어둡게 젖은 윤곽
푸른 하늘도 망명하고 없는 슬픈 파르티잔의 10월
[시평]
담쟁이는 억센 팔을 가졌다. 그래서 늘 등등한 퍼런 기세로 여름 내내 담장을 기어오른다. 이렇듯 억센 팔과 퍼런 기세의 등등함으로 담장을 오르던 담쟁이넝쿨도, 가을이 되면 붉게 물들어 가을바람에 그 슬픈 몸짓 다만 서걱이곤 한다. 마치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AK 소총을 들고, 나귀 고삐를 잡고, 박격포를 메고, 일렬로 행진하는 한 무리의 슬픈 민병대마냥.
푸른 하늘도 망명을 하고 없는, 그래서 훌쩍 망명의 길로 들어서고 싶은 슬픈 파르티잔의 10월. 담장에 달라붙어 서걱이는 붉게 물든 담쟁이넝쿨. 그래서 그 붉은 색마저 열정이 되지 못하는 가을. 수수밭 쓰러지듯 붉게 쓰러지는 가을 저녁, 우리 삶의 혁명, 다만 어둡게 젖어만 가고 있구나.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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