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검

이유경(1940~  )

박물관에서 뼈만 남은 고검 한 자루를 본다

피투성이 시간들 녹슬어 떡이 돼있고
첩첩한 어둠 한 가운데
무명 장수의 미라처럼 눕혀져 있지만

그의 뼈 속 어딘가 시퍼런 날이 숨어 있다.

[시평]
칼은 녹이 슬어도 칼이다. 박물관 어느 구석 녹이 슬고 또 부패가 되어 이제는 뼈만 남은 고검 한 자루. 그 칼을 바라보며 시인은 그 칼이 지내왔을 멀고도 먼 시간을 떠올린다. 전쟁터에서 서로 부딪치고 부딪쳐 수많은 피를 불러왔을 그 시간들. 그 시간들 다만 녹슬고 떡이 되어 이제는 무명 장수의 미라처럼 눕혀져 전시가 되어 있어도, 뼈 속 어딘가 아직 살아 숨쉬고 있을 칼의 그 시퍼런 날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몸도 마음도 예전과 같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들. 그러나 그 몸 속 어디 한 구석에는 시퍼런 날, 숨어 있으리라. 숨어 숨쉬고 있으리라. 서울 낙원동 일원을 지나며, 시인이 만났던 ‘고검’, 그 고검의 숨어 있는 시퍼런 날들, 오늘도 때때로 만나곤 한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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