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샘골강습소를 그대로 재현한 ‘최용신기념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성경·한글 등 교육 강조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예로부터 샘물이 잘나고 물맛이 좋은 동네로 알려진 샘골(천곡)마을. 바닷가지만 유난히 우물이 많았던 이 마을은 일찍부터 개신교교회가 선교활동을 진행하던 동네(당시지명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다. 그중 근대계몽운동의 선두주자는 단연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1909∼1935) 선생이다. 더운 여름 날 최용신의 흔적이 담긴 안산 개신교교회의 ‘어머니 교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샘골교회와 최용신기념관을 찾았다.

◆안산의 성지 샘골교회
지하철 4호선 상록수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와 800m쯤 걸으면 최용신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기념관은 샘골교회와 함께 상록공원 내에 있어 샘골교회를 통해 기념관으로 가거나, 기념관으로 통해 샘골교회로 갈 수 있다.

▲ 최용신기념관으로 가는 상록공원 입구에는 두 팔을 크게 벌린 최용신 선생 조형물이 어린 제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동상이 방문객을 맞는다(왼쪽). 왼쪽에 무궁화가 새겨진 묘는 최용신 선생의 묘이며, 오른쪽에 큰 십자가가 새겨진 묘는 선생의 10년 약혼자 장로 김학준 교수의 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있는 상록수역에서 상록공원까지의 거리에는 최용신 선생과 제자들의 이야기로 구성된 조형물이 곳곳에 있다. ‘만남’ ‘이끔’ ‘향함’ ‘안김’ 네 가지 조형물을 통해 관광객은 잠시나마 당시 최용신 선생과 제자들의 애틋함을 느낄 수 있다.

이곳 입구에는 두 팔을 크게 벌린 최용신 선생 조형물이 어린 제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동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이 조형물은 일본 유학을 갔다가 7개월 만에 돌아온 최용신 선생의 소식을 들은 한 제자가 5리(약 2㎞)를 걸어 선생의 품에 안긴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용신 선생의 조형물은 150㎝ 정도나 실제로 선생을 만나 는 듯하다.

계단을 오르면 간단한 운동을 할 수 있는 운동기구와 뜨거운 햇볕을 피해 잠시 나무 그늘에서 쉴 수 있는 벤치가 있다. 그 길로 쭉 가면 최용신기념관 지하 1층이 나온다. 이곳에선 최용신 선생이 사용했던 물품과 무궁화 자수 지도, 유언장 등을 볼 수 있다. 한쪽에 마련된 강당에선 교육을 강조했던 최용신을 알아보는 강의가 진행된다.

▲ 체험전시실 바로 앞에 있는 소원나무에는 학생들이 각양각색의 종이 안에 소원을 담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그 길로 다시 나와 오른쪽으로 작게 나 있는 계단을 오르면 70여 년 전에 있던 샘골강습소를 그대로 재현한 최용신기념관 1층이 나온다. 전체면적 545㎡(165평), 한옥 형태의 기념관은 방문객들이 당시 교육활동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체험전시실 바로 앞에 있는 소원나무가 눈길을 끈다. 전시관을 다녀간 학생들이 각양각색의 종이 안에 소원을 담았다. 50년대 교육 자료였던 정문틀도 인상적이다.

◆샘골강습소는 없어지고, 샘골교회는 그 자리에
상록공원에는 특이하게도 무덤이 있다. 기념관을 등지고 공원 왼쪽 길로 내려가면 무덤 두 기가 나온다. 무덤으로 가는 보도사이로 잡초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음에도 무덤은 정돈돼 있었다.

왼쪽에 무궁화가 새겨진 묘는 최용신 선생의 묘이며, 오른쪽에 큰 십자가가 새겨진 묘는 선생의 10년 약혼자 장로 김학준 교수의 묘다. 큰 십자가에서 그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둘은 생전에 극진한 사랑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 선생의 사망 소식을 접한 약혼자 김학준 교수는 대한해협을 건너 급히 달려와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이후 못다 한 사랑을 나누기라도 하듯 자신의 외투를 선생의 관 위에 덮어줬다고 한다.

무덤을 지나 꼬불꼬불한 길을 내려가면 샘골교회가 나온다. 길마다 꽃들이 즐비해 포토존을 연상하게 한다. 교회 측에서 키우는 것으로 보이는 호박과 상추, 고추 등이 싱그럽게 열려 있다.

샘골교회 시발점은 1907년 양노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홍원삼‧홍순호 형제가 한 가정집 마루에서 예배를 보면서부터다. 이후 1931년 최용신 선생이 농촌계몽사로 샘골에 부임하게 되면서 규모가 커진다. 최용신 선생은 예배당 겸 학원에서 성경과 한글을 가르치다가 샘골강습소를 짓게 됐다. 활발한 활동으로 많은 교육생을 배출한 샘골강습소는 1969년 강사 및 학생부족 등 운영상 어려움으로 문을 닫고 지금의 샘골교회만 자리에 남게 됐다.

▲ 샘골교회. ⓒ천지일보(뉴스천지)
◆하나님 뜻 받들어 젊음 던진 최용신
“겨레의 후손들아.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네 가지 요소가 있나니… 첫째는 가난의 훈련이요, 둘째는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요, 셋째는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이요, 넷째 는 위인의 전기를 많이 읽고 분발함이라.” - 故 최용신 -

상록수(常綠樹)역에는 ‘상록수’가 없다. 안산에 사는 시민들도 왜 역이름이 ‘상록수’ 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역이름 ‘상록수’는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인 최용신이 항일운동과 농촌계몽운동을 한 샘골마을에서 유래된 것이다. 샘골마을은 훗날 상록수마을로 개명됐다.

샘골교회에는 상록수가 있다. 바로 최용신이 직접 심은 향나무들이다. 현재 샘골교회 인근 상록공원에는 1934년 최용신이 심었던 나무 중 5그루가 남아 있다. 70여 년 전 여성도 남성과 같이 사회개혁에 동참해야 한다고 외치며 농촌에 뛰어들어 문맹 퇴치와 생활개선을 주도하자고 외친 20대 처녀 최용신 선생. 그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고 외치며 농촌계몽운동을 펼쳤으며 일본강점기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교육을 통해 조국광복의 꿈을 심어줬던 계몽운동가다.

당시 계몽운동이 쉽지만은 않았다. 농민은 중등교육 이상 받은 신여성에게 파란 눈의 노란 머리를 가진 외국인 선교사만큼의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학생들이 강습소를 찾았으며 그가 남긴 상록수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