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운교 위 승가사 9층 호국보탑 앞에서 바라본 경치가 일품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참선수도 도량으로
이름 높은 신라 고찰

많은 문학인들이 찾아
경치보며 시·글 집필해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높은 바위 산길은 험한데, 지팡이 짚고 도등라(藤蘿) 휘어잡네. 처마가엔 가던 구름 머물고, 창 앞엔 쏟아지는 폭포 많을세라. 차를 끓이니 병에서 가는 소리 나고, 물을 길으니 우물에 작은 물결지네. 두어 명 높은 스님 있어 공(空)한 것 보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네.” - 승가사를 읊은 정인지(鄭麟趾)의 시 -

조선 전기 문신 겸 학자 정인지는 북한산에 있는 승가사에 대해 이같이 노래했다. 예부터 동에는 불암사, 서에는 진관사 남에는 삼막사, 북에는 승가사(僧伽寺)를 한양 근교 명승사찰로 꼽았다. 그 중에서도 참선수도도량으로 이름 높은 신라의 고찰 승가사는 고려 시대부터 많은 시인 등 문학인이 찾았다. 이들이 사찰 주변의 경치를 보고 수많은 시와 글을 남겨 놓을 만큼 승가사의 아름다움은 경이롭다. 그 발자취가 지금까지 이어져 불자가 아닌 많은 사람도 승가사를 찾고 있다.

▲ 일주문을 지나면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두용이 조각된 청운교가 나온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멀고도 험한 승가사 가는 길
서울역에서 7022번을 타고 승가사입구역에서 내려 등산객을 따라 걷다 보면 등산복 상점과 음식점 등을 지나 북한산입구가 나온다. 그렇게 시작된 산행. 등산객을 따라 걸으니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승가사 팻말이나 표시가 없어 지도를 보고 왼쪽 길로 향했다. 북한산 구기탐방지원센터에서 1시간가량 오르면 북한산 제일의 비구니 선원인 승가사가 보인다. 산 중턱에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가 보이고 승가사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승가사라고 적힌 작은 돌비가 아니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에 있는 승가사는 비구니 선원이다. 승가사는 두 봉우리의 중간지점쯤 산 중턱에 위치했다. 왼쪽엔 신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세워진 비봉(碑峰)이고 오른쪽에 승가봉(僧伽峰)이 있다. 현재 진흥왕순수비는 보존관리상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졌고 그 자리에 유지비(遺址碑)가 세워져 있다.

절 입구 일주문의 현판 ‘삼각산 승가사’는 원당스님이 썼다고 전해진다. 일주문 기둥 앞에 귀여운 연꽃이 조각돼 있다. 화려함을 강조한 다른 사찰의 일주문보다 더욱 인상적이다.

◆말을 잃게 한 승가사 주변 전경

▲ 한 불자가 땡볕에도 승가사 9층 호국보탑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일주문을 지나면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두 용이 방문객들을 반긴다. 청운교라는 이름의 이 계단은 모두 108개로 9층 호국보탑까지 이어져 있다. 계단 중간쯤 오른편에는 삼각산 승가사 사적비(三角山 僧伽寺 四月初八日)가 있다.

중창불사를 해서 계단은 하얀 돌로 돼있다. 이 때문에 이곳이 산인지 도시인지 헷갈리게 했지만 중간쯤 올라 무심코 뒤를 돌아본 순간 그 장관에 말을 잃었다. 본래 승가사의 전경은 말을 잃게 한다고 불자들에게 익히 들었지만 직접 보고 나니 더욱 실감이 났다. 계단 좌우로 소나무가 감싸고 있으며 앞에는 북한산이 펼쳐져 있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서울 중심부에서 한 시간 남짓 걸려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경치는 수려하고 상쾌했다. 게다가 계단을모두 오르면 그 감동은 극에 달한다.

◆정교하고 섬세한 국내 유일의 호국보탑
청운교 꼭대기에는 승가사 9층 호국보탑이 등장한다. 그 규모에서부터 남다른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이 석탑은 아자형(亞字形)평면 양식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이다. 그 외관은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 10층 석탑과 비슷하나 근래 건축한 탑 중 형식과 규모가 뛰어나다.

튼튼한 기단 부분 위로 사자와 코끼리, 호랑이 등 십이지 동물과 불교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무서운 표정으로 새겨져 있다. 석공이 굉장히 정교해 감탄을 자아낸다. 그 위로 사천왕상이 탑을 지키고 있어 안정감이 느껴진다. 또 주위 산세가 석탑과 어우러져 있어 수려한 경치가 일품이다.

이 석탑조성의 발원은 주지 상윤스님이며 설계는 김광항 씨가, 조각은 김광열 씨가 맡았다. 높이 25m의 이 탑에는 인도정부로부터 공식 기증받은 부처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 1과, 아라한 사리 2과, 패엽경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등이 봉안되어있다고 알려졌다.

땡볕도 불자들의 불심을 이기진 못했다. 승가사를 찾은 불자는 뜨거운 볕을 다 받으며 탑을 앞에 두고 기도에 전념했다.

▲ 원당스님이 썼다고 전해진 ‘삼각산 승가사’ 현판. ⓒ천지일보(뉴스천지)
◆왕들의 기도도량이었던 사찰
승가사는 756년(경덕왕 15년)에 수태(秀台)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수태스님은 중국 당나라 고종 때 장안천복사(薦福寺)에서 생불(生佛) 소리를 들었던 서역 출신의 승가대사(僧伽大師)의 행적을 듣고 그를 기리는 뜻에서 사찰의 이름을 승가사라 지었다.

창건 이후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는 여러 차례 왕들이 승가사로 행차해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가파른 산길을 왕들이 어떻게 올랐는지 의문이 든다. 이 외에도 조선 초기 고승 함허(涵虛)스님과 조선 후기의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城月)스님 등이 모두 이곳에서 수행하는 등 예로부터 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왔다.

조선 후기에는 불교 부흥운동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감당했으며 6.25전쟁으로 불에 타 크게 망가진 사찰을 1957년에 도명(道明)스님이 수리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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