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내일 25일은 6.25가 발발한 지 63돌이 되는 날이다. 연대급 부대조차 지휘해 본 경험이 없는 약관 38세의 대위 출신 김일성은 박헌영과 소련의 말만 믿고 그 엄청난 동족상잔의 비극을 시작하였다. 전쟁은 정치가들의 잘못된 판단과 수많은 우연한 요인에 의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바로 한국전쟁이 그랬다. 북한의 전쟁초기 전략은 한국의 수도인 서울을 점령하고 거기서 남한의 국회를 소집하여 한반도 통일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그동안 여러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6.25전쟁 준비과정에서 북한군 작전국장을 지낸 유성철의 증언, 개전초기 북한군 6사단 정치보위부 군관으로 근무했던 최태환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소련군 군사고문관들이 작성한 작전계획대로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이 예상한 20만 명의 남로당원들은 봉기하지 않았으며 유엔군의 전쟁 참전 등 북한 지도부로서는 예상치 못한 긴급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개전초기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은 전쟁작전계획이 서울 점령까지로 작성됐다고 증언하는 한편 소련군사 고문단장 라주아예프(V. N. Razuvaev)는 북한군의 남조선 해방작전은 4단계로 이루어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제1단계는 서울 점령 이후 수원-원주 선까지 진출하는 것이며, 지속기간은 4일, 작전종심은 90㎞였다. 제2단계는 천안-제천 선까지 진출하는 것이며, 지속기간은 4일, 작전종심은 40∼90㎞였다. 제3단계는 대전-경북 선산까지 진출하는 것이며, 지속기간은 10일, 작전종심은 90㎞, 제4단계는 임실-거창-왜관-포항 선까지 진출하며 작전종심은 40∼80㎞였다.

북한군이 서울에서 머문 기간은 무려 7일이었다. 라주아예프의 작전계획대로라면 벌써 청주계선까지는 내려갔어야 할 북한군이 서울에 그토록 오래 머무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 해답을 김두봉의 1950년 6월 24일의 연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한국군의 육군본부는 6월 27일 오전 1시경 미 군사고문단에도 통보하지 않고 경기도 시흥으로 철수함으로써 일찌감치 서울 사수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미 군사고문단의 라이트(Sterting Wright) 중령으로부터 맥아더의 전방 지휘소가 한국에 설치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서울에 복귀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폭파된 한강 철교를 넘어선 탱크를 앞세우고 북한군은 남침의 길을 재촉하여 벌써 7월 14일경에는 금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남진하는 북한군을 따라 전쟁 중 김일성은 모두 세 번에 걸쳐서 남한 지역을 방문하였다. 그의 남한 지역 방문은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을 독려하는 것 못지않게 해방구를 시찰하는 승자의 만족감이 도취되어 있었을 것이다. 각각 7월 16일, 8월 1∼2일, 8월 9∼14일이었다. 8월 1일의 남한 방문 시에 김일성은 멀리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에 있는 전선사령부(사령관 김책)를 직접 방문하였다. 북한 당국은 전쟁 전략수행에서 철저한 상벌제를 운영하며 군인들을 압박하였다.

1950년 7월 10일 중동부 전선에서 공격을 지연시킨 책임을 물어 2군단장 김광협을 즉각 참모장으로 강등시켰으며 그 자리에 무정 장군을 임명하였다. 춘천 공격의 직접적인 책임을 물어 이청송을 2사단장직에서 해임하고 최현을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파죽지세의 북한군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추풍낙엽신세가 되었다. 결국 미숙한 김일성에 의한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은 오늘날 영구분단의 비극을 가져다 준 것 외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다.

군산복합이란 말이 있듯, 김일성 왕조는 군당복합체로 저 20세기의 유물을 지금껏 지탱시켜 오고 있다. 다가오는 7월 27일 휴전 60주년을 맞으며 북한은 새로운 ‘전승이데올로기’를 선언할 예정이다. 지고도 이겼다고 우기는 전쟁, 벌써 기발을 내려야 할 체제가 아직 버티고 있는 명분을 정당화시켜 주기에 이제 약관의 김정은 체제는 너무 빈약하다. 이제 진정으로 조국해방전쟁을 수행해야 할 쪽은 대한민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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