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산성당 앞에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 예수 십자가상이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대구와 함께 100년의 역사 지낸 사적
경북지역 가톨릭의 중심지 역할 ‘톡톡’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조선시대 천주교 신자들은 신유박해(1801년), 병인박해(1866년) 등 박해를 받아 충청도 내륙 산중이나 대구 인근 오지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한양과 제법 떨어져 있어 천주교 신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츰 교세가 커진 대구 천주교 중심에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계산성당(桂山聖堂)’이 있다. 현재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인이 성당은 경북지역 가톨릭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성당 외관
꽃샘추위가 주춤했던 지난 15일 파란 봄 하늘이 대구 하늘을 덮었다. 대구 중구 계산동에 있는 계산성당의 첨탑은 파란 하늘을 찌르듯 솟아 있었다. 서쪽 정면에 종탑(鐘塔) 기능을 하는 2개의 8각형 첨탑은 전주 전동성당과 함께 아름다운 쌍탑으로 유명하다. 성당 문 위에 있는 무궁화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건물과 어우러져 이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당시 꽃무늬 창은 한국의 건축 양식에서 획기적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성당 앞에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 예수 십자가상이 보인다. 성당 측은 지난 2009년 담장을 허물어 세상과의 벽을 한 층 더 없앴다. 그 때문인지 해마다 많은 신자가 성당을 찾는다. 성당 외관은 카메라로 한 번에 담기 어려울 만큼 규모가 컸다. 규모가 크면 허전해 보일 수도 있으나 이 성당은 고딕양식으로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쌓아 올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안으로 들어서면 성당의 매력을 한층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회색 벽돌로 된 기둥은 양옆으로 줄지어져 있는데 기둥마다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프랑스 선교사 아실 폴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신부가 성당을 지을 때 직접 만들어 붙인 것이다. 성당 안은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나오는 빛이 가득 차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스테인드글라스의 매력이 더 돋보였다. 계산성당은 다른 성당과 다르게 성경에 나오는 네 생물과 천주교 박해 때 순교했던 성인들이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져 있다.

◆천주교 3대 성당 중 하나… ‘뾰족집’이라 불려
원래 계산성당은 1899년 지금의 성공회 강화도성당처럼 십자가 형태의 2층 구조로 기와를 올린 한옥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하지만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이 나서 전소했다. 이후 로베르 신부가 설계하고 공사를 지휘해 완성된 건물에서는 1902년 12월 3일 첫 미사가 거행됐다.

아름다운 설계와 100년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성당은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 사적 제290호로 지정받았다. 대구에서는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시민은 입구에 있는 두 개의 첨탑을 보고 ‘뾰족집’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의 ‘명동성당’, 전주의 ‘전동성당’과 함께 천주교 3대 성당으로 불리는 명성만큼 웅장하고 멋스러워 유명 인사들의 결혼식‧웨딩화보 장소로 많이 사용됐다. 1950년 12월 12일에 있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결혼식이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당시 주례를 맡은 허억 대구시 초대시장은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이라고 말해 하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신랑과 신부의 이름을 혼돈한 탓이다.

이외에도 1951년 9월 15일 故 김수환 추기경이 이 성당에서 사제 서품 받았으며, 1984년 5월 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해 어린이들에게 축복하는 등 많은 역사가 담겨있다.

▲ 프랑스 선교사 아실 폴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신부. ⓒ천지일보(뉴스천지)
◆한국 천주교 위해 힘쓴 로베르 신부
성당을 정면으로 두고 오른쪽 길로 가다보면 작은 정원이 나온다. 이 정원 한가운데 로베르 신부 흉상이 있다. 로베르 신부는 대구의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소속 로베르 신부의 한국이름은 김보록(金保祿)이다. 1876년 사제가 된 로베르 신부는 이듬해 두세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입국해 강원도 이천(伊川)을 거쳐 경기·강원도 낭천(浪川), 지평, 부흥골 등지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1882년 경상도 지역의 전담 신부로 임명받은 그는 먼저 대구 시내로 진출하려 했으나 당시 천주교에 대한 적대감과 신자들의 위협 때문에 경상도 신나무골 교우촌에 거처를 마련한다. 5년 뒤 그는 대구시로 거처를 옮기고 대구성당을 설립한다. 이때 그는 대구의 아전 2명이 신자들을 투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중 허콜롬바라는 여성 신자가 있었는데 그는 투옥돼 옥살이하면서도 신앙을 지켰다. 로베르 신부는 즉시 서울과 프랑스에 알려 이들을 석방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허콜롬바 투옥사건’이다.

이후 로베르 신부의 거처가 주민에게 알려졌고 많은 사람이 호기심을 갖고 구경을 왔다. 그들 가운데 천주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불량배들이 신부의 거처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고 신부와 신자를 모욕했다. 이에 로베르 신부는 판관과 감사를 찾아가 건의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일행을 대구 밖으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아전과 포졸, 군중은 돌을 던지고 구타하는 등 이들에게 모욕을 줬고 가까스로 몸을 피한 로베르 신부는 조선교구장 뮈텔에게 사건의 전말이 담긴 서한을 보냈다.

서한을 받은 뮈텔 주교는 프랑스 공사 플랑시를 통해 조선 정부에 항의하고 대구감사의 파면과 보상 등 6개항을 요구했다. 그 결과 조선 정부는 감사 파면 외 5개 항에 대한 요구를 수락하고 프랑스 공사에 공식 사과문을 보냈다. 협상이 타결되자 다시 대구로 거처를 옮긴 로베르 신부는 이후 30년 동안 대구지방의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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