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고된 노동과 준비의 시간(1911~1918) 나라가 망하자 연해주 분위기가 일변했다. 홍범도 같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당국의 감시받는 존재가 되었다. 러시아로서는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이 일본을 자극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1911년 홍범도를 비롯한 이상설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을 빼고, 생업을 장려한다는 ‘권업회’를 조직하게 된 것도 러시아 당국의 압박 때문에 취한 고육책이었다. 홍범도도 ‘권업’에 나섰다. 1912년 가을, 동지들과
을미사변으로 의병 봉기 시작해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 이끌어노년, 연해주 한인동포 위해 힘써[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무려 78년만의 귀환이다. 독립을 위해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던 ‘하늘을 나는 홍범도’의 유해가 이방에 묻혀 있다가 드디어 꿈꾸던 독립된 조국으로 돌아왔다.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 27일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동네 아낙네들로부터 젖동냥을 통해 자랐다. 9살에 아버지마저 여읜 홍범도는 15살에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
봉오동 전투 대승거둔 주역배척당한 경계인으로 생마감일부시민 “홍장군 잘모른다”부족한 역사의식 지적 나와[천지일보=김빛이나, 홍보영 기자] “홍범도 장군요? 이름은 들어봤는데 솔직히 어떤 일을 하신 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독립운동가라고만 알고 있는데요.” “봉오동 전투에서 활약하신 분 아닌가요? 영화에서 봤던 기억이 나요. 오늘 유해 봉환인지는 몰랐네요.”일제강점기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가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광복절 76주년을 맞은 뜻 깊은 날 귀환하는 것이지만 정작 시민들
“독립군 기리는 일은 국가의 책무”[천지일보=명승일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코로나19 때문에 늦어졌지만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와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할 것”이라고 밝혔다.문 대통령은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인 이날 SNS에 “독립군을 기리는 일은 국가의 책무”라며 이같이 말했다.봉오동 전투는 일제 강점기 시기인 지난 1920년 6월 우리나라 독립군이 중국 지린성의 봉오동 계곡에서 일본군과 싸워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다.문 대통령은 “100년 전 오늘 홍범도
[천지일보=정다준 기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본부장 박종석)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최초의 승리이자 최고의 전과 중 하나인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 68만 8000장을 5일 발행한다.봉오동 전투는 일제 탄압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무장투쟁으로 자주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1920년대 독립전쟁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계기가 됐다.기념우표는 독립기념관에 소장 중인 서양화가 임직순(1921~1996)의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를 담았다.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은 1920년 6월 4일 새벽
우리나라는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암울한 시대였다. 일제는 우리의 말과 글을 쓸 수 없게 함은 물론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역사와 문화마저 무참하게 짓밟았다. 이때 우리 선열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이국만리 타국에서 죽음을 무릅쓴 독립운동을 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에서 그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선혈의 공로를 마음에 품은 이들이 있다. 민족종교 천도교 청소년들이 중국 만주지역 항일유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4박 5일간 동행 취재한 항일유적지 답사 이야기를 2회에 걸쳐 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