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박준성 기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15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특별수송기를 통해 국내로 봉환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맞이하고 있다. (제공: 청와대) ⓒ천지일보 2021.8.15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15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특별수송기를 통해 국내로 봉환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맞이하고 있다. (제공: 청와대) ⓒ천지일보 2021.8.15

을미사변으로 의병 봉기 시작해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 이끌어

노년, 연해주 한인동포 위해 힘써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무려 78년만의 귀환이다. 독립을 위해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던 ‘하늘을 나는 홍범도’의 유해가 이방에 묻혀 있다가 드디어 꿈꾸던 독립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 27일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동네 아낙네들로부터 젖동냥을 통해 자랐다. 9살에 아버지마저 여읜 홍범도는 15살에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군의 부정부패를 목도하고 병영을 탈출한 그는 신계사(神溪寺)의 지담대사 밑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반일의식을 가지게 됐다.

홍범도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12명의 동지와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해 1896년 8월 유인석 의병부대와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일본군과의 전투로 함께하던 의병들이 죽거나 도망했고 1897년까지 평남, 함남, 황해도 접경지역에서 단독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그는 사냥과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는데 일본이 1907년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을 강제 시행하자 인근에 있는 포수들을 중심으로 화전농민, 광산노동자, 해산군인 등을 모아 의병부대를 다시 결성해 봉기했다. 이 의병부대는 홍범도가 1908년 11월 연해주로 망명할 때까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크고 작은 성과를 이룬다. 여기서 ‘하늘을 나는 홍범도’라는 별명이 붙었다.

일본의 탄압으로 국내 의병 활동이 어려워지자 홍범도는 1908년 11월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했다. 연해주에서 유인석 등과 함께 재기를 도모했으나 1910년 8월 일본에 조국이 삼켜지면서 이상설·최재형 등과 ‘권업회’를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이어나갔다.

홍범도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 일부를 이끌고 간도로 간 홍범도는 거기서 간도 대한국민회의 지원으로 대한독립군을 편성하면서 본격적인 작전을 진행했다.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고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묵념하고 있다. (제공: 청와대) ⓒ천지일보 2021.8.18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고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묵념하고 있다. (제공: 청와대) ⓒ천지일보 2021.8.18

홍범도가 사령관으로 있던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을 갖춘 부대였다. 사령관 홍범도 밑으로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에 박경철이 있었고 대한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해 국내 진공작전을 진행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주위에 있던 다른 독립군 부대 또한 국내 진공작전으로 들쑤시자 일제는 250명의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본거지인 봉오동까지 쫓아간다.

봉오동의 지형을 이용하기 위해 독립군은 월강추격대를 골짜기까지 유인했다. 월강추격대가 골짜기로 들어서자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 연합은 총포를 쏘면서 대승을 거뒀다. 당시 독립신문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의 수는 157명이며 그 외의 인원들도 중경상을 입었다. 하지만 독립군은 4명의 전사자만 기록했다. 이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봉오동 골짜기의 지형을 잘 활용한 덕분이었다.

봉오동 전투의 기세를 몰아 독립군 연합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도 다시 큰 승리를 거둔다. 청산리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은 1200여 명에 달했으며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다. 반면 독립군은 사망 130여 명, 부사장 220여 명이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로 약이 바짝 오른 일제는 간도의 한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 참변’을 저질렀다. 이에 독립군들은 러시아 영토인 자유시로 넘어갔으나 여기서도 지도부간의 충돌로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고 독립군은 힘을 잃고 만다. 홍범도 역시 지휘권을 잃었고 이후 연해주 등지에 있는 농장에서 일하면서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힘썼다. 하지만 1937년 9월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터전을 강제로 옮기게 된다. 결국 그는 낯선 땅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1943년 10월 25일 75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이번 유해 봉환과 함께 지난 17일 독립기념관은 한 영상을 공개했다.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이 담긴 유일한 것으로 1922년 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 개막식 내용을 담고 있다. 개막식에 참석한 이들 중 키가 크고 부리부리한 눈빛의 인물이 바로 홍범도 장군이다. 홍범도 장군은 9척 장신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키가 커 영상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해당 영상은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가 2018년 러시아 국립 사진·영상물 보관소에서 찾아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것이다.

그동안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김영삼 정부 때 홍범도 장군 묘소를 처음 조사했지만 북한과 카자흐스탄 교민들의 반발로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이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유해 봉환은 광복 76주년인 지난 15일에 이뤄졌다. 이번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에 대해 황원섭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하신 분들을 끝까지 존경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며 “그동안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일부 오해가 있었는데 이번 봉환을 계기로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출처: 독립기념관)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출처: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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