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형 너른마당 대표가 지난달 18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너른마당 앞에서 광갵대왕비를 모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2.3.8
임순형 너른마당 대표가 지난달 18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너른마당 앞에서 광개토대왕비를 모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2.3.8

인터뷰|임순형 너른마당 대표

 

고양시 ‘너른마당’서 광개토대왕비 17년째 추모제 열어

대왕 ‘불굴의 기계와 웅혼한 기상’ 후손에게 물려줘야

‘고구려 제법’ 몰라 하늘에 지내는 ‘천제 제법’으로 올려

추모제 보러 왔다가 광개토대왕비 보고 눈물 많이 흘려

[천지일보=조혜리 기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에 통오리밀쌈으로 유명한 문화 명소 ‘너른마당’ 식당 앞에 광개토대왕비가 실물 크기(6m)로 복제돼 들어서 있다. 매년 음력 9월 29일이면 거대한 비석 앞에서 합동 추모제가 열린다.

너른마당 뜰 앞 서문에는 ‘우리는 위대한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후예임을 잊은 채, 늘 약소민족인 양 스스로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선조들의 불굴의 기계와 웅혼한 기상을 후손에게 길이 전해주고자 5년여의 노력 끝에 광개토대왕비를 모셔 오게 됐다. 우리 민족의 끓는 피는 반도에만 머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임순형 너른마당 대표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너른마당 앞에서 광개토대왕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해당 광개토대왕비는 임 대표가 현지 석공에게 요청해 제작한 것으로 실물 크기(6m)로 복재됐다. ⓒ천지일보 2022.3.8
임순형 너른마당 대표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너른마당 앞에서 광개토대왕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해당 광개토대왕비는 임 대표가 현지 석공에게 요청해 제작한 것으로 실물 크기(6m)로 복재됐다. ⓒ천지일보 2022.3.8

본지는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비를 세우고 17년째 추모하고 있는 임순형 너른마당 대표를 인터뷰했다. 임 대표는 30년 전 어머니와 함께 너른마당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꿩 요리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통오리밀쌈이라는 차별화된 메뉴를 앞세워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아름다운 한옥으로 지어진 너른마당 앞에 광개토대왕비가 웅혼한 기상으로 우뚝 서 있어 고양시를 넘어 전국적으로 문화 명소로 알려졌다. 일반식당과는 다른 특별함을 간직한 식당을 차린 임 대표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까.

임 대표는 “정직하게 일했고 그 땀과 노력이 지금의 너른마당을 만들었다”며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느낀 우리 민족에 대한 벅찬 자긍심으로 대왕비를 모시게 됐고 그 덕분에 너른마당이 전국의 문화 명소가 됐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다음은 임 대표와의 일문일답.

◆ 광개토대왕비를 모셔 오게 된 계기는?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아주 조그마한 사진으로 봤다. 1990년 말쯤인가 고구려 국내성에 여행을 갔다.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위대한 선조들의 기운을 받아야 했기에 현지에서 고구려의 기상을 그대로 담아 광개토대왕의 혼을 한국으로 실어서 가자는 마음이 솟구쳤다. 오로지 드넓은 고구려의 기상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광개토대왕비를 모셔 올 준비를 했다.

 

◆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광개토대왕비를 모셔오는 데 약 5년이 걸렸다. 광개토대왕비가 모셔져 있는 지방현은 북경 공항에서 차를 타고 1600㎞, 약 23시간 걸리는 곳에 있다. 광개토대왕비를 가져온다는 소식을 들은 국내 한 석공이 자신에서 맡겨 달라고 했다.

석공에게 국내서도 잘 만들 수 있지만, 고구려의 현지 기상과 정신을 모셔 와야 했기에 현지의 돌과 솜씨로 만들어야 한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그렇게 만주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을 시작할 때 사진을 보여주고 수치를 재어 사진대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현지에서 비석이 완성됐다고 해 가서 보니 이들은 비석이라고 생각하고 납작하고 넓적하게 만들어 놨다. 두께도 얇게 만든 것이다. 현지 석공에게 화가와 함께 광개토대왕비를 직접 보고 오라고 했다. 현지 석공들도 광개토대왕비 웅장함에 놀랐다. 하지만 크기와 모양, 글자 등을 실물처럼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완성 직전에 비가 깨지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04년 비로소 거대한 4면 돌기둥 비석이 제작됐다. 

높이 6.3m, 둘레 6.6m, 무게 47t으로 실물 크기와 비슷하고 한자도 원형과 같은 1775자가 새겨진 비석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 언제부터 추모제를 지냈나?


비석을 세워놓으니 학생들이나 공무원 임용되신 분들이 와서 비석의 기상을 보고 갔다. 광개토대왕은 영웅임에도 영웅 대접을 못 받고 있다. 광개토대왕이 다스리던 땅이 남한과 북한, 조선족으로 흩어져 있고 북만주땅 요동벌을 다 내어줬다. 또 고조선의 단군 역사와 고구려 역사가 중국 변방국의 일부 역사로 왜곡이 되고 있으니 광개토대왕의 넋이 헤매고 다닐 것 같아 넋을 달래드리기 위해 추모제를 시작했다. 고구려 제법을 몰라서 하늘에 지내는 천제 제법으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 뜨거웠다. 추모제를 보러 왔다가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많았다.

 

◆ 돈은 얼마나 들었고,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


돈이 얼마 들었는지, 이런 것을 묻는 것은 불경죄다. 우리 가족에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낳아서 지금껏 키워주셨으니 약 10억짜리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지 않나? 이것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얼마 걸렸다. 이 정도만 이야기한다. 그들이 우리의 문화를 도굴하면서 돌아가신 유골을 돌아보았겠는가. 그 유골들이 이곳에 다 떨어져 어딘가로 흩어졌겠지. 인생이 꼭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가. 훌륭하신 분들은 영원히 살아 신선같이 돼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면 좋겠다.

 

◆ 너른마당을 어머니와 함께 어떻게 시작했나?


어머니는 배우지 않았지만 지혜롭고 예절을 중시했다. 바느질 솜씨와 음식 솜씨가 정말 좋았다. 동네 두레가 있는 날 우리 집 순서가 되면 형님 이름이 순철인데 ‘순철네 두레가 있는 날은 잘 먹는 날’이라고 동네 분들이 좋아했다. 아버지는 음식 드실 때 까다로웠다. 꼭 소스가 있어야 했다. 고추장도 그냥 고추장이 아닌 초를 쳐야 했고 간장도 그냥 간장이 아닌 초라도 쳐야 했다.

ⓒ천지일보 2022.3.8
너른마당 전경. ⓒ천지일보 2022.3.8

◆ 너른마당에 오니 소중한 우리 문화를 보는 것 같다


이 터전은 앞으로 천년을 가게 하려고 만든 터전이다. 몸에 좋은 음식도 있고, 광개토대왕비도 있고 추모제도 하고 있다. 연못은 신라의 안압지를 모태로 꾸미고 있다. 안압지를 만들 때는 백제사람들이 와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삼국의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모든 것은 하늘에서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조상이 돕고 주위에서 도와줘야 한다. 서로 조화와 상생으로 만들어지는 터전이 바로 너른마당이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부모님들께서 해 오신 방법대로 정화수 떠 놓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신(修身)하고 있다. 맘 편히 배고프지 않고 조상 잘 모시고 살면, 천년이 아니라 만대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수신(修身)이다. 이것이 바로 효의 마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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