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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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대선이 채 50일도 남지 않았다. 향후 5년의 대한민국을 읽을 수 있는 거대한 ‘정치 축제’의 판이 열려야 하건만, 축제는커녕 저주와 음모, 고소와 고발 그리고 비난과 냉소가 넘쳐나고 있다. 이건 비극도 보통 비극이 아니다. 정치의 비극은 고스란히 국민 다수의 비극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의 실패는 그대로 경제의 실패로, 경제의 실패는 그대로 양극화를 극대화시키면서 국민 다수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글로벌 경쟁력 저하로 표출되면서 국익에도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지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희망과 미래를 얘기해도 부족한 지금, 반대로 정치의 비극을 말하는 것 자체부터가 비극적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판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치의 ‘거대한 위기’는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는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대라는 시대적 소명을 위해 쉼 없이 전진해 왔다. 그 결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수준은 생각보다 더 발전됐으며, 국민의 정치의식도 몰라보게 성숙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따라 한국은 선진국형 민주정치의 수준을 확보하고 있는 아시아 최강의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민주주의의 심화’였다. 하지만 바로 이 단계로 진입해야 할 절박한 시점에서 한국정치는 지금껏 수 십 년째 표류하고 있으며, 급기야 주요 정치세력들이 ‘정치 기득권세력’으로 변질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심화는 곧 ‘민주주의의 적들’에 대한 배제가 아니라 ‘설득과 동의’를 통한 협력으로 구축된다. 따라서 시간이 많이 걸릴뿐더러 그 과정도 순탄할 리가 없다. 민주주의의 심화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물리적인 힘이나 폭력으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국민 다수의 지지와 정치권력의 정당성 그리고 더 큰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권의 협력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길이다. 선진국의 민주정치는 대부분 이런 과정을 통해 구축된 것이다.

‘촛불혁명’이 말해 주듯이 혁명적 시대를 창출한 문재인 정부에게 기대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의 심화였다. 더 큰 민주주의, 실질적 민주주의 시대를 여는 원년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뿐더러 지난 총선에서는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까지 확보했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을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적폐청산의 방식도 배제와 엄벌이 아니라 설득과 동의에 방점이 찍히길 바랐다. 적폐들에 대한 동정심이나 우호적 접근이 아니다. 혹여 공세의 미숙함과 역습의 노련함에서 생길 정치적 갈등과 충돌, 국민적 분열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역사적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익히 알다시피 정치권의 정쟁은 끝없이 이어졌으며, 길거리에서는 ‘내편과 네편’으로 나뉘어져 싸우고 또 싸웠다. ‘조국사태’는 그 정점이었다. 게다가 아파트값 폭등과 적폐들에 대한 공세의 미숙함은 여론마저 등을 돌리게 했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의 급부상은 그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직전까지 현 정부의 검찰총장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정치권에 뛰어들어 야권을 대표하는 대선후보가 될 수 있었던 작금의 현실은 씁쓸하다 못해 자괴감마저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격화된 두 거대 정당의 끊임없는 정쟁은 결국 민주주의의 성숙과 심화를 지체하게 만든 배경이 되고 말았다.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우면서도 끝내는 정치권력을 나눠먹는 ‘정치 담합’도 이뤄냈다. 30년간 지속된 ‘87년 체제’를 당장 끝장내자는 개헌 논의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연동형 비례제’를 짓밟고 거대 양당체제를 재구축하는 과정은 곧 ‘적대적 공생관계’의 적나라한 행태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이는 문재인 정부한테도 매우 아픈 대목이다.

두 쪽으로 나뉜 정치 기득권세력의 핵심 전략은 생각보다 간명하다. ‘갈라치기’가 그 핵심이다. 뭐든 큰 이슈가 되면 찬성과 반대라는 갈라치기의 기조 위에 모든 정치 동력을 동원한다. 여기에는 다수의 언론과 전문가들도 동참한다. 그리하여 끝내는 여론마저 ‘내편과 네편’으로 나뉘기 일쑤다. 최근의 ‘젠더 논쟁’도 예외가 아니다. 20대 청년들의 고통과 눈물마저 편 가르기를 통해 그들 정치 기득권세력의 자산으로 삼고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이대남’과 ‘이대녀’가 그것이다. 그들 20대 젊은이들의 고통이 다르지 않으며, 그들 남녀의 눈물도 하나일 텐데도 일부 정치인들은 또 그들마저 ‘갈라치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하나로 끌어안아도 부족한 판국에 그들의 갈등을 부추기고 대립을 촉발시키면서 정치 기득권세력의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도 책임이 작지 않을 것이다.

‘갈라치기’, 사전을 찾아봤다. “바둑에서, 상대편의 돌이 두 귀에 있는 경우 변(邊)의 중앙 부분에 자기의 돌을 놓아 아래위 또는 좌우의 벌림을 꾀하는 일”이라고 설명돼 있다. 바둑판이 아니라 정치판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갈라치기는 정치 기득권세력의 중요한 포석 전략으로 이해된다. 마치 정치판도 바둑판처럼 상극과 대결의 ‘제로섬 게임’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화합과 상생의 가치를 생명으로 해야 할 정치판이 마치 바둑판처럼 ‘갈라치기 전술’이 통하고, 또 그런 정치인들이 성공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건 이미 ‘정치’가 아니다. 전쟁일 뿐이다. 이런 정치판에는 ‘미래’나 ‘희망’, ‘정책’이 들어설 공간도 별로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국민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아니 국민이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 마치 바둑판의 돌처럼, 장기판의 졸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닐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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