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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조(正祖)는 동궁(東宮)으로서 1775(영조 51)년의 과거시험(科擧試驗)에서 시험문제 유출사건을 적발했지만 그 비호세력이 강하여 진상을 규명하지 못한 채 처리된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이후 과거시험에서 부정(不正)이 발생하면 엄중히 처벌하라고 영(令)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당파(黨派)에 전혀 물들지 않은 관료를 직접 양성해 친위세력(親衛勢力)을 구축하는 문제를 추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는 중국 송나라 대에 학자들을 우대하고 자문을 구하기 위해 전각을 짓고 학사들을 초빙하여 우대하였던 제도를 참고로 하여 왕권강화(王權强化) 수단으로서 규장각(奎章閣)을 구상하게 됐다.

이와 관련해 정조는 규장각의 설립에 착수하여 1776(영조 52)년 9월에 준공했는데, 본래 규장각의 유래는 숙종(肅宗)이 역대 임금의 어제(御製)를 모아 종정사(宗正司)에 보관하고 그 곳에 규장각이란 현판을 걸면서 비롯됐다.

이런 관점에서 규장각은 외형적으로 볼 때 궁중(宮中)의 책(冊)과 유물(遺物),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肖像畵)와 인장(印章) 등 다양한 물품을 보관하는 왕립도서관(王立圖書館) 겸 박물관(博物館)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러한 규장각의 규모를 확대 재편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변모시켰으니 그 구체적인 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상한 호문(好文)의 군주(君主)로서 여러 신하들과 경사를 토론하고 민생의 고통과 정치의 득실을 연구하자는 것이었다. 둘째, 정조의 정치적 초창기의 인선에 있어서 관례에 구애됨이 없이 새로운 동지적 신하들을 포섭함으로써 그에게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인 내척(內戚)과 외척(外戚)을 제거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규장각은 세종(世宗) 대에 설립되었던 집현전(集賢殿)과 그 성격이 유사한 면이 있었으나, 개혁을 추진하고 신하들을 친위세력화 한다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이와 같이 정조는 송나라 대의 정치가(政治家)이자 학자(學者)인 왕안석(王安石)의 개혁정치(改革政治), 명·청의 전각제도, 세종 대의 집현전 등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규장각을 구상했던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자신이 직접 관리하고 운영하면서 조직과 기능을 늘려갔는데, 초기에는 책임자로 제학(提學) 2명, 부책임자인 직제학(直提學) 2명, 직각(直閣) 1명, 대교(待敎) 1명 등 6명을 두고 이들을 통칭해 각신(閣臣)이라 불렀다.

이와 관련해 정조는 1776(영조 52)년 9월 제학으로 황경원(黃景源), 이복원(李福源)을 임명했으며 직제학은 홍국영(洪國榮), 유언호(兪彦鎬) 그 이후 추가로 채제공(蔡濟恭)과 김종수(金鍾秀)를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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