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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조(正祖)는 1752(영조 28)년 9월 22일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영풍부원군(永豊府院君)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 탄생했는데 휘(諱)는 산(祘)이며, 자(字)는 형운(亨運)이라 했다.

이와 관련해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잉태할 때 사도세자는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이만수(李晩秀)가 찬(撰)한 정조 행장(行狀)의 일부를 인용한다.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상으로 들어왔었는데, 꿈속에서 본 대로 그 용을 그려 벽에다 걸어뒀더니 탄생하기 하루 전에 큰 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자욱해지더니만 몇 십 마리의 용이 꿈틀꿈틀 하늘로 올라갔고 그것을 본 도성의 인사들 모두는 이상하게 여겼었다.

급기야 왕이 탄생하자 우렁찬 소리가 마치 큰 쇠북소리와도 같아서 궁중이 다 놀랐으며 우뚝한 콧날에 용상의 얼굴과 위아래 눈자위가 펑퍼짐한 눈에 크고 깊숙한 입 등 의젓한 모습이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3세 때인 1754(영조 30)년 가을 궁중(宮中)에 보양청(輔養廳)이 설치됐고, 8세인 1759(영조 35)년 2월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冊封)됐으며 2년 후인 1761(영조 37)년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冠禮)를 거행(擧行)했다. 또한 1762(영조 38)년 2월 11세에 어의궁(於義宮)에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과 가례(嘉禮)를 올린 이후 창덕궁(昌德宮)으로 환궁(還宮)했다.

그러나 그해 윤 5월 13일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8일 후인 5월 21일에 운명(殞命)했고, 7월 23일 양주의 배봉산에 장사지냈다. 이와 관련해 영조(英祖)는 직접 장지(葬地)까지 따라가서 곡을 하고 위패(位牌)도 친필로 썼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 “어찌 부자(父子)의 정을 잊었으랴마는 국가를 위해서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죽은 이후 사도세자에 관한 일로 인하여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이러한 장례(葬禮)가 끝난 다음날에 영조의 명에 의하여 파격적인 조치가 시행되었으니, 사도세자 아들의 신분을 왕세손(王世孫)에서 동궁(東宮)으로 격상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고 부왕(父王)으로서 죽은 아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하는 배려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영조의 이러한 파격적인 조치를 바라보는 노론 측의 입장은 난처했으니 사도세자의 죽음을 찬성한 입장에서 만약에 그 아들이 등극(登極)한다면 부친(父親)의 죽음에 대하여 복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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