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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정조(正祖)의 50년에 걸친 생애에 있어서 부친 시도세자(思悼世子)와 관련된 문제는 정조가 왕위를 계승한 이후 심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사도세자의 묘소(墓所)가 화성(華城)으로 이장(移葬)된 경위를 소개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목숨을 잃은 사도세쟈의 묘소는 본래 양주 배봉산 묘역에 안장되어 영우원(永祐園)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수은묘(垂恩墓)라 했다. 이와 관련해 1764(영조 40)년 봄에 북부 순화방에 건축했다가 여름에 동부 숭교방으로 옮기고 수은묘라 하던 것을 정조 즉위년 4월에 개축을 시작해 8월에 완성해 경모궁(景慕宮)이라 개칭하고 어필편액(御筆扁額)을 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789(정조 13)년 7월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올린 상소가 하나의 계기가 돼 영우원을 수원(水原)의 화산(華山)으로 이장했는데, 이곳은 신라의 국사였던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용(龍)이 여의주(如意珠)를 희롱하는 형국으로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명당(明堂) 중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당시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소재지가 화산 기슭이라는 점이었다는 것인데 국고(國庫)에서 10만 냥을 지출해 이를 팔달산(八達山) 아래로 옮기고 공사를 시작해 가을에 묘소가 완공됐다.

새로운 묘소를 현륭원(顯隆園)이라 명명한 정조는 10월 4일 친히 묘소에 나가 무덤을 열고 염을 새로 한 후 다음날, 여기를 떠나 10월 7일 화산에 도착했다. 정조는 부친을 묻으면서 목이 메어 눈물을 쏟을 뿐 말을 하지 못했는데, 초가을의 추위 속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친히 공사를 감독해 9일 후가 되는 10월 16일에 마무리를 지었다.

또한 정조는 현륭원 근처에 용주사(龍珠寺)를 건립해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하사(下賜)하고 당대의 화가 김홍도(金弘道)로 하여금 불화(佛畵)를 그리게 했으며, 승려 철학(哲學)과 사일(師馹)로 하여금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게 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완공한 이후 해마다 현륭원을 참배했으며, 그때마다 부친의 최후를 생각하면서 슬픔에 잠겨 묘소에 엎드려 일어날 줄을 몰랐다고 전하고 있으니 그 효심(孝心)이 얼마나 지극 정성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래 수원 화산에 위치하였던 수원도호부를 팔달문 아래로 옮긴 이후 현륭원의 경비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장용영 외영(壯勇營外營)의 군사 수 천 명을 배치했으며, 화산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백성들도 국가에서 철거비와 이주비를 받고 새로운 도시가 건설될 예정인 팔달문 아래로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정조는 1794(정조 18)년에 화성축조(華城築造) 계획을 발표했는데, 10년에 걸친 공사를 계획하면서 완공될 때까지 왕권을 충분히 강화시킨 후에 화성이 완공됨과 동시에 왕세자(王世子)에게 양위(讓位)를 하고 상왕(上王)으로서 화성행궁(華城行宮)에 거쳐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 기간이 대폭 단축되어 1796(정조 20)년에 화성이 완공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해 공사기간이 예상외로 단축된 결정적인 요인은 당시 설계를 담당하였던 정약용(丁若鏞)이 발명한 기중기(起重機)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이러한 화성의 완공을 기반으로 하여 장용영을 전진 배치했으며, 벽파(辟派)에 강력한 경고를 하면서 정국이 긴장되는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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