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not caption

“지금 우리나라는 내전적인 분열 상황에 있습니다. 이런 분열 상황을 끝내야 되는데 이런 분열 상황을 끝내기 위한 지도자로서 제가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도자로서 적합하다, 이런 생각을 했고요. 또 제가 평생 법관으로 감사원장으로 살아오면서 법치주의, 무너진 법치주의를 세우는 데 제가 기여할 수 있다. 이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지난 5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원론적인 발언으로도 들리지만 그러나 잘 따져본다면 이 또한 내로남불(아시타비)의 전형에 가깝다.

먼저 최재형 전 원장이 말한 ‘내전적인 분열 상황’은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분열의 중심은 ‘거대 양당’ 간의 ‘진영 정치’임을 이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최 전 원장이 말한 그 내전적 분열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진영 정치의 프레임을 뛰어 넘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통합’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최 전 원장은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내전적 분열 상황의 한 쪽 당사자인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거기서 어떻게 내전적 분열 상황을 끝내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쓸어버리겠다는 것인가. 또 그것을 위해 여권을 향한 비난과 독설 대열에 나서겠다는 것인가. 그것이 분열을 끝내고 통합을 이루는 길이란 말인가. 어불성설이요, 하나마나한 얘기다. 구태의연한 정치꾼들의 빛바랜 레퍼토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차라리 솔직하고 개념 있는 김동연 전 부총리의 지적이 더 양심적이고 날카롭다. 대선 출마를 고민하는 김 전 부총리는 한 방송 인터뷰에서 거대 양당체제에 대한 비판을 정확하게 짚었다. 김 전 부총리는 “한쪽은 묻지마 정권교체를 하고 싶어 하고, 다른 한쪽은 정권 재창출을 하려 하는데, 어떤 결과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과연 20년 넘게 묵은 과제가 풀릴 수 있을까”라며 거대 양당체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밝혔다. 그러면서 거대 양당체제의 구도를 깨는 새로운 시도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경제부총리를 지낸 경륜 있는 전문가의 날카로운 정치인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김 전 부총리만큼은 현 시점에서 국민통합을 말 할 수 있는 반듯한 위치에 선 셈이다. 그게 정치의 상식이요, 공감력 있는 메시지이며 동시에 미래로 가는 비전이다. 최소한 이런 점에서 최재형 전 원장의 인식은 비슷한 정치 초보인 김동연 전 부총리에도 한 참 미치지 못한다.

하나만 더 짚어 보자. 최재형 전 원장도 법치주의를 강조했다. 검찰이나 법관 출신들은 마치 그들이 법치주의의 보루라도 되는 양 정치권에 진입할 때는 너도나도 법치주의, 헌법정신 운운하고 있다. 사실 그들 중 얼마나 많은 법조인들이 법치주의와 헌법정신을 짓밟으며 국민 분열을 촉발시키고, 시도 때도 없이 상대방을 향해 고소·고발을 남발하면서 진영대결을 더 고착시키고 있는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최 전 원장도 그 범주에서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감사원의 정치적 중립성은 헌법정신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임기까지도 헌법 조문에 담은 것이다. 그러나 최 전 원장은 임기를 중도에 그만 둔 채 곧바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이는 헌법정신이 부여한 감사원의 위상을 스스로 짓밟은 것에 다름 아니다. 감사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맨 앞에서 사수해야 할 사람이 스스로 임기를 던지면서 정치판에 뛰어 든 셈이다. 현직 감사원장으로서 있을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너진 법치주의를 바로 세우겠다고 한다. 논리도, 상식도 없으며 신뢰할 수도 없다.

당초 감사원장직을 던지고 대선 판에 뛰어든 것만 제외하고는 비교적 긍정적인 요소가 많다고 봤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국민의힘에 전격 입당한 것은 꼼수 대신 ‘정수’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윤석열 전 총장과도 비교가 됐다. 게다가 좌충우돌의 억지 이벤트를 남발하지 않고 겸손하면서도 낮게 임하는 태도도 괜찮았다. 부산의 한 지역구 의원을 방문해서는 인근에서 아내와 함께 쓰레기를 줍는 모습은 소박하면서도 참신한 이미지가 돋보였다. 특히 최재형 하면 떠오르는 높은 도덕성과 박수를 받을 만큼의 인생 스토리도 좋게 평가될 것으로 봤다. 중도세력과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에게 관심을 받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보를 보면 딱히 무엇 하나 인상적인 것이 없다. 감사원장직을 사퇴한 지 32일 만인 지난 4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출마 선언문을 보면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난과 아전인수식 주장, 추상적이고 왜곡된 현실 인식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는 결여돼 있다. 절망적인 현실을 부각시키면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치만 나열했다. 대선주자로의 출마 선언문 치고는 허무하다. 감사원장직을 던지고 대선에 출마한 정치신인의 대선출마 출사표로 보기엔 낙제점이다. 뒤늦게 드러난 최재형 전 원장의 역사인식도 놀랍다. 애국가 4절 열창은 다소 유치한 얘기라 치더라도 역대 대통령 가운데 헌법가치의 측면에서 가장 높게 평가한 인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꼽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와중에도 자신의 재집권을 위해 1차개헌을 입맛대로 강행한 인물이다. 그리고 피로 쓴 4.19혁명의 역사는 그 자체가 이승만 전 대통령의 헌법 유린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헌법가치를 지킨 최고의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꼽는다면 역사를 제대로 모르거나 아니면 수구·보수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략적 발언에 다름 아니다. 그런 얍삽한 언행은 참신하고 합리적 인물로 알려진 최재형의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점점 진영 정치에 매몰돼 가는 최 전 원장의 언행에서는 기대했던 임팩트 있는 메시지가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윤석열 전 총장을 따라가기에도 벅찰 것이다. 자칫 존재감조차 드러내지 못한 채 감사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먹칠만 하는 것은 아닌지, 정치신인 최 전 원장의 최근 언행이 불안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진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