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not caption

주역 곤괘(坤卦)의 문언은 건괘의 문언과 함께 공자의 저작으로 알려졌다. 문(文)은 요즈음 고문이니, 현대문이니 하는 것과 달리 어떤 사상을 문자로 표현했다는 뜻이다. 진(晋) 이전에는 계사전(繫辭傳)에 포함돼 있었는데, 천재 왕필(王弼)이 건괘와 곤괘 뒤에 따로 편집했다. 곤괘 문언은 곤괘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이다. 곤은 순음(純陰)으로 지극히 부드럽지만 움직일 때는 강하다. 지극히 고요하지만 덕은 반듯하다. 왕필에 따르면 곤의 움직임이 반듯하고 올곧은 것은 사특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약하고 원만하기만 하면, 움직임이 소멸된다. 그러나 곤에는 고요하지만 부당한 외부의 압력을 물리칠 수 있는 강한 힘이 내재돼 있다. 그것이 방(方)이다. 사실상 우주에서 절대적으로 약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물이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내재된 힘이 있기 때문이다. 강(剛)과 유(柔), 강(强)과 약(弱)은 상대적이다. 건괘도 강강(剛强)함을 드러내지만 결국 유약해지고, 곤도는 유약(柔弱)하지만 결국 강강해진다. 곤도는 유약함 속에 강강함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땅은 하늘이 움직이면 따라서 움직인다. 겸손의 덕으로 우주의 율령(律令)을 주재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계를 품에 안고 항상성을 유지한다. 나중에 떳떳하게 주도권을 잡는다.

곤괘가 상징하는 땅은 만물을 머금어 화육(化育)한다. 건도가 창조적이라면 곤도는 창조의 결과를 끝까지 유지하고, 성질과 형상이 다른 것들을 시의(時宜)에 맞춰 조화롭게 만든다. 선후(先後)의 유불리(有不利)는 절대적 원칙이 아니다. 건괘가 선(先)의 유리함을 추구한다면, 곤괘는 후(後)의 유리함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곤은 나중을 위해 충실히 덕을 쌓는다. 미리 선을 쌓은 적선지가(積善之家)는 반드시 좋은 일이 넘치고, 선을 쌓지 않은 집은 반드시 재앙이 넘친다. 신하가 군주를,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이 하루아침에 생겼겠는가! 원인은 작은 기미에서 점차 자라났는데도 미리 분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일은 순조로워야 한다는 말이다. 순조롭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필연성을 의미한다.

상대를 해치는 표현은 다르다. 구양수(歐陽脩)에 따르면, 양쪽이 대등한 입장에서 싸우는 것을 공(攻), 대가 소를, 중앙이 지방을 공격하는 것을 벌(伐), 아래에서 위를 공격하는 것을 반(反), 상대의 죄를 묻는 것을 토(討), 큰 죄로 엮어 죽이는 것을 주(誅), 같은 편이었다가 배반하고 적에게 귀순하는 것을 반(叛), 홀로 항복하는 것을 항(降), 자신의 관할지역까지 들어서 항복하는 것을 부(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이는 것을 시(弑), 올바른 목적이 없으면서 죽이는 것을 살(殺)이라고 한다. 죽음에 대한 표현도 다르다. 공적인 일을 위해 죽는 것은 사(死), 사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 것은 망(亡), 늙거나 병에 걸려 죽는 것은 몰(歿)이다. 따라서 신하와 자식이 군주와 어버이를 죽이는 패역은 시(弑)이다. 여경과 여앙은 경사와 재앙이 단대에 그치거나 한 집안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선대의 복과 재앙은 최소한 삼대에 미치고, 한 가정의 경사와 재앙은 천하까지 영향을 미친다.

군자는 공경으로 내부를, 옳음으로 외부를 반듯하게 한다. 공경과 옮음이 확립되면 덕은 외롭지 않다. 굳이 익히지 않아도 의심을 받지 않을 만큼 수양이 됐기 때문이다. 직(直)의 반대는 곡(曲), 방(方)의 반대는 원(圓)이다. 의(義)는 직과 방의 윤리적 개념이 외부로 나타난 현상이다. 유가의 이상형인 군자는 곡과 원을 경멸한다. 곡과 원을 더 높이 평가하는 쪽은 도가이다. 자연의 모습은 모두 곡과 원이다. 직과 방은 인문의 결과이다. 이황(李滉)은 소수서원개울 건너편 벼랑에 경(敬)이라는 붉은 글씨를 새겼다. 이이(李珥)는 중용을 바탕으로 성(誠)을 중시했다. 이황은 내면을, 이이는 외면을 중시했다. 누군가를 해치는 강한 말이 선행을 의미하는 부드러운 말보다 횡행하는 안타까움이 괴롭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