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의 힘

권달웅(1944 ~  )

청보리를 흔들고 가는 바람을 보았다. 아무도 만나지 아니한 초록빛 바람을 만났다.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 보리 잎과 보리 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파도처럼 일어났다. 끝없는 벌판이 출렁거렸다. 내 몸이 멀리까지 가는 바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내 정신이 길들여진 습성에서 깨어나 파도에 부딪치고 있었다. 짓밟히면 짓밟힐수록 더욱 시퍼렇게 살아나는 오월의 푸른 힘이 지평선에 닿아있었다. 초록빛 소리가 출렁거리는 청보리밭에는 종달새가 높이높이 날아올랐다.

 

 

[시평]

혹한의 겨울을 견딘 보리가 싹을 틔우고 그 틔운 싹이 점점 자라나 푸른 잎으로 자라나는 계절, 오뉴월이다. 수확기를 앞두고 보리는 푸른 물결 같은 잎을 바람결에 휘날린다. 요즘은 이러한 오뉴월 보리밭의 푸른 출렁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일부러 보리밭을 찾아간다. 마치 보리밭의 그 출렁거림에서 푸르른 힘을 받으려는 듯, 사람들은 푸른 청보리밭을 찾아간다.

어쩌면 요즘의 보리는 먹기 위해 재배가 된다기보다는, 이렇듯 사람들에게 푸른 힘을 주는, 그래서 이 푸른 힘을 얻어가게 하기 위해 재배가 되는 듯하다. 그리하여 청보리밭에 서면 보리밭에서 부는 바람으로 인해 길들여진 습성으로부터 깨어나, 짓밟히면 짓밟힐수록 더욱 시퍼렇게 살아나는 오월의 푸른 힘을 마음과 몸으로 받아낸다. 이렇듯 보리는 요즘에 이르러 육신의 곡물이기보다는 정신의 곡물이 되고 있다.

실은 우리의 어린 시절에도 그랬다. 겨우내 추위에 갇혀 지내던 아이들이 보리가 자라나는 계절이면, 밖으로 뛰어나와, 그 중 몇몇 극성스러운 아이들은 보리밭 안으로 뛰어들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논다. 키가 큰 보리밭은 우리들의 좋은 숨바꼭질 놀이터가 되곤 했다. 나중에 보리밭 주인에게 혼이 날망정, 우리는 보리밭 속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뛰어논다. 보리의 푸르른 힘, 아마도 우리는 그 어린 시절부터 온몸으로 이렇듯 받으며 자라왔는지도 모른다. 짓밟히면 짓밟힐수록 더욱 시퍼렇게 살아나는 오월의 그 푸른 청보리의 힘을.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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