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꽃

정한용(1958 ~  )

흰 꽃이 피었습니다
보라 꽃도 덩달아 피었습니다
할미가 가꾼 손바닥만한 뒤 터에
꽃들이 화들짝 화들짝 피었습니다
몸은 땅에 묻혀 거름이 되고
하얀 옷깃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무더기로 손 쓸립니다
수년 전 먼저 길 떠난 내자(內子)를 여름빛으로 만나
한참을 혼자 바라보던 할애비도
슬며시 보랏빛
물이 듭니다

 

 

[시평]

도라지꽃은 7월에서 8월, 그러니까 여름이 시작되면서 흰색으로, 또는 보라색으로 피는 꽃이다. 꽃이 위나 옆을 향해 있고, 끝이 펴진 종 모양으로 돼 있다. 그 빛깔이나 모양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환한 모습의 분명한 색깔을 지닌 꽃이다. 꽃말은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영원한 사랑’이다.

손바닥만 한 뒤 터는 어딘가 적적해 보였는데, 도라지꽃이 하얗게, 또는 보라색으로 피어나니, 그래도 흔들흔들 바라볼만 하다. 마치 도라지꽃으로 화들짝 놀란 듯, 뒤 터는 다소나마 소란스러워 보인다.

뒤 터에 피어난 도라지꽃들을 바라보며, 문득 할애비는 수년 전 먼저 먼 길을 떠난 내자(內子)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어딘지 흰색이든 보라색이든 선명했던 기억이 언뜻 스치며 지나간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한참을 혼자 바라보던 할애비 가슴 한켠으로 슬며시 보랏빛 물이 든다.

이제 여름이 시작되면 머잖아 도라지꽃이 뒤란뿐만 아니라, 산천에도 피어날 텐데,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그 마음이 선명한 흰색으로, 보라색으로 피어날 텐데. 도라지꽃을 바라보며, 슬며시 젖어 드는 보랏빛 그리움, 뒤란으로 산천으로 온통 바람에 흔들리며 피어날 텐데.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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