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규 대중문화평론가

not caption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배우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는 74세 배우 윤여정이 한국영화사를 다시 썼다.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발표한 오스카 후보 명단에서 ‘미나리’는 작품상·남우주연상(스티븐 연)·감독상·각본상(이상 정이삭)·음악상(에밀 모세리) 등 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저력을 과시했다. 순자의 사위로 등장한 제이콥을 연기한 스티븐 연도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윤여정은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재미교포 2세 정이삭(리 아이작 정, 43) 감독의 영화 ‘미나리(MINARI)’로 한국 배우 사상 처음으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윤여정은 1966년 TBC(동양방송)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 올해로 연기 경력 55년차다.

‘미나리’는 한국의 전형적이면서 다소 독특한 캐릭터인 할머니 ‘순자’의 색깔을 강하게 보여준다. 여기에 한국 문화를 접해보지 못한 교포 2세 손주들과 부딪히면서 캐릭터 간의 상호작용은 불을 뿜으며 관객들에게 큰 재미를 선사한다.

‘미나리’는 희망을 찾아 낯선 미국으로 떠나온 한국 가족의 특별한 여정을 담고 있다. 한국 이민자들이 살고 싶어하는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가 아닌 척박하고 사람 사는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 아칸소의 대지에 미장센을 활용한 감독의 철학도 주목할 만하다.

젊은 아버지 제이콥(스티븐 연)은 시골에서 삶을 개척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지만 아내와 의견이 달라 자주 다툰다. 감독은 보통 이민자들의 삶이 그렇듯, 가족사를 낭만화하지 않고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빠, 엄마, 아들, 딸, 할머니 등 가족의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여기서 할머니 순자(윤여정)는 투박하면서도 직설적인 하지만 속은 한없이 깊은 한국형 할머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연스럽고 담백하게 불러일으킨다. 미나리는 그저 단순한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 꿈과 생각은 다르지만 사랑의 언어를 통해 소통하고 진심을 전달한다.

미나리는 감상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고 할머니 순자가 가족 속에서 중심을 잡으며 가족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 참여 계기에 대해 “도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 속에서 순자는 7살짜리 손주에게 화투를 주고 다소 엉뚱한 모습과 투박함을 보여주면서 인간미 넘치는 새로운 캐릭터를 구축했다.

순자 할머니는 낯선 땅 미국에 미나리를 심는다. 식구들 걷어 먹일 마음으로 가져와 심는 미나리는 낯선 미국 땅에 뿌리를 막 내리려는 한국인 이민자 가족들을 묘사한다.

이 영화가 오스카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일부러 멋진 영화를 만들기 위해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은 그 순수함과 담백함일 것이다. 요즘 같이 살기 힘들고 복잡한 사회 환경 속에서 미나리는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힘을 제공한다.

미국인들이 이 영화를 미국영화라고 우기든 혹은 순수한 한국영화라고 여기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언어와 국적을 떠나 많은 이들이 오래전 경험했던 기억의 조각들을 떠올리고 한계를 벗어나 모두가 공감하는 정서를 완성한 영화다.

윤여정의 멈추지 않는 행보는 많은 영화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멈추지 않는 기차처럼 윤여정은 존재만으로 관객에게 큰 위로를 전하며 담백하고 거침없는 연기를 선사할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