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결기가 사라진 세상에서 횡행하는 처세론은 오로지 유불리에 판단뿐이다. 해야 할 일이냐고 묻는 사람은 드물다. 협은 유불리보다 당위성을 중시했다. 유불리를 따지는 세상은 끝없이 충돌하지만 당위성을 따지는 세상은 정의롭다. 문제는 당위성이 보편적 가치를 지니느냐에 달려있다. 묵자는 ‘대협(大俠)’이었다. 무위도식하다가 가끔씩 세상사에 끼어드는 건달과는 거리가 멀고, 부자를 털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보태주는 의적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협이다. 그렇다고 절세의 무공을 지닌 무협소설의 주인공도 아니다. 그는 2500여년 전인 춘추시대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심오한 사색에 빠져 세상의 지혜를 찾는 철학자의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사상을 현실화했던 영웅의 이미지가 더 진하게 느껴진다. 근대 이후 묵자사상의 연구자들은 그를 철학자로서의 가치와 협객으로서의 역할을 일치시키려고 했다.

만청시대 진풍(陳灃)은 묵자에게서 죽음을 능사로 삼은 전국시대 협객의 기풍을 느낀다고 했다. 강유위(康有爲)도 협과 묵을 동일시했다. 양계초(梁啓楚)는 유와 협을 대치시켰다. 사기에서는 유가는 문(文)으로 법을 어지럽히고, 협은 무(武)로 법을 무시한다고 했다. 묵가는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고 남에게 이익이 되면 실행하고, 자신이 싫더라도 남에게 급하면 기꺼이 나서야 한다고 가르쳤다. 회남자(淮南子)에서는 ‘묵자를 따르는 180명은 조직의 명이라면 기꺼이 불에도 뛰어들고, 칼날에도 몸을 던질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육가(陸賈)의 신어(新語)에서는 묵자의 문중에는 용사가 많았다고 했다. 전국말기부터 한초까지 유협전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별묵(別墨)’이라 해도 좋다.

사마천이 유협전에서 주장한 협의도(俠義道)를 표준으로 삼으면 묵가의 언행은 대체로 협객과 일치된다. 협은 신뢰와 약속을 중시했다. 묵가는 말은 믿음이 있어야 하며, 행동은 결과가 있어야 하므로, 언행은 조금도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은 어려운 사람을 구해준다. 묵가는 힘이 있으면 재빨리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하고, 재물이 있으면 최대한 남과 나눠야 하며, 도를 알면 남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지배층에게는 위험했지만, 약자에게는 반가웠을 것이다. 협은 도의를 중시했다. 묵가는 의를 천하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했다. 협은 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자랑이다. 묵가는 정수리의 털이 다 빠지고, 뒤꿈치가 다 닳아도 천하가 이롭다면 기꺼이 그것을 행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묵가의 제자들은 지도자의 말에 억지로 따르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에 따랐다.

묵가는 협기로 남을 위협하지 않았고, 아무 때나 객기를 부리지 않았으며, 말 한마디 때문에 싸우지도 않았다. 은혜를 입었다고 그를 위해 함부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의롭지 않다면 은혜도 거절했고, 자객이 돼 누군가를 해치지도 않았다. 약속을 지키려고 남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며, 대책도 없이 함부로 남의 싸움에 끼어들지도 않았다. 공연히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으며, 불평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삼았다. 천하의 이익을 크게 일으키고, 천하의 해악을 제거한다는 웅대한 포부를 지녔다. 자신의 생명을 버리더라도 의를 취했으며, 의가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위험해도 달려갔으며, 의가 아니면 만금을 주더라도 사양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진정한 ‘대협’의 자세일 것이다. 풍우란(馮友蘭)은 묵가의 핵심을 겸애와 협의의 실천뿐만 아니라, 치국평천하를 위한 도를 체계화해 보편적 정의를 구축한 것이라고 했다. 고매한 정신과 인격은 그가 죽었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문화와 역사에도 유전적 생명력이 있다고 주장한 도킨스의 말이 옳다면 분명 어딘가에 묵자의 유전자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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