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외가에서 보낸 의친왕(義親王)이 마침내 그의 나이 15세가 되는 1891(고종 28)년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당시 왕세자(王世子)이었던 순종황제(純宗皇帝)의 후사(後嗣)를 염려하여 다시 궁궐로 불러들인 이후 그 이듬해 의화군(義和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이후 1893년(고종 30)에 연안김씨 가문(延安金氏家門) 김제남(金悌男)의 10대손 김사준(金思濬)의 딸 김덕수(金德修)와 길례(吉禮)를 올렸다.

의친왕은 이듬해인 1894(고종 31)년 9월에  고종황제(高宗皇帝)의 황명(皇命)에 의하여 일본에 보빙대사(報聘大使: 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대사) 자격으로 파견되었으며, 40여일 동안 활동한 이후에 귀국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을 ‘고종실록(高宗實錄)’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고종 31(1894)년 10월 3일(음력 9월 5일) - 일본에 대한 보빙대사 이준용이 상소하여 체차시켜 줄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일본에 보빙대사로 의화군 이강을 특별히 보내어 우호 관계를 두터이 하라’하였다.

고종 31(1894)년 10월 10일(음력 9월 12일) - 일본 보빙대사 의화군 이강이 사폐를 하였다.

고종 31(1894)년 11월 17일(음력 10월 20일) - 일본 보빙대사 의화군 이강이 복명하였다.”  그런데 1895(고종 32)년 10월 8일에 한 나라의 국모가 일제의 무사들에 의하여 시해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을미시해(乙未弑害)로 인하여 고종황제와 황태자(皇太子)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며, 조정(朝廷)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의친왕은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였으며, 그로부터 불과 5일 후에 다시 고종황제의 황명(皇命)에 의하여 특파대사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인데 ‘고종실록’의 내용을 인용한다.

“고종 32(1895)년 10월 13일(음력 8월 25일) - 의화군 이강을 특파대사에 임용하고 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각국을 답례방문하라고 명하였다.”

이와 관련해 의친왕의 6개국 순방과 관련된 자료의 대부분이 실제 다녀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제국의 후예들’과 ‘마지막 황실의 추억’ 제하의 책에서 그러한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필자 또한 답례방문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관련 내용을 인용한다.

먼저 ‘제국의 후예들’ 376~377쪽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다.

“실록에 나와 있는 대로 이강은 특파대사로 임명된 후 앞서 언급된 여러 나라를 순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방문국에서의 일화나 행적 같은 것은 밝혀진 게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특파대사 활동을 언제 끝냈는지, 또 언제 귀국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실록에서 찾을 수 없다.

이강이 일본 보빙사 시절 찍은 사진은 전해오지만 유럽 순유 중에 찍었다는 사진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강의 생애를 다룬 거의 모든 기록은 그가 유럽 6개국을 순방하고 귀국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국인명대사전(1967년)’에 기록된 이강의 행적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한독수교 100년사’의 연표에는 ‘구주 6개국 보빙대사 이강 공이 중도에 사임함’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연표는 이강이 사임한 날을 ‘1895년 11월 25일’이라고 명시했다. 특파대사로 임명된 지 40여일만에 순유 자체가 무산된 것이다. 설령 이강의 사임이 유럽으로 출발한 후 이뤄졌다 하더라도 당시 교통사정상 유럽까지 도착하지는 못했을 듯하다.

이강이 1896년 봄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는 기록도 유럽 순유가 없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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