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06(광무 10)년 의친왕(義親王)이 귀국하고 그 이듬해인 1907(융희 1)년 1월에 북한산성에서 거사를 결행하였는데 구체적으로 1월 15일에 의친왕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문관 3명, 군관 105명, 민간인 120명 등 총 228명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의병봉기(義兵蜂起)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사가 결행된 시기인 1907(융희 1)년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하여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1905(광무 9)년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이어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된 해였다.

이러한 때 228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을 북한산성에 소집할 수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사건으로 보여지는데, 단순히 모임을 한 것이 아니라 의친왕의 비장에 넘친 연설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으니, 북한산성 거사는 의친왕이 귀향창의(歸鄕倡義)를 권고하면서 당시 참여자 중의 일부가 실제로 고향에 가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하니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당시 의친왕의 연설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점은 이러한 거사를 일제의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실행할 수 있었으며, 당시에 참석한 인명부(人名簿)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총 참여 인원이 228명이었는데 그나마 이러한 자료가 발굴된 것도 참여자 중의 1명인 목형신(睦衡信)이 1945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의친왕의 연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서 작성된 ‘목형신의 관병. 의병생활 개인일지’제하의 귀중한 자료를 통하여 밝혀진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자료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 구체적인 거사 장소로 자료에는 북한산성이라고 되어 있는데, 북한산성은 1711(숙종 37)년에 대대적으로 축성된 것이며 특히 전란(戰亂)이나 변란(變亂) 시에 왕이나 대신들이 머무르는 처소인 행궁(行宮)은 그 이듬해인 1712(숙종 38)년에 준공(竣工)되었다.

한편 거사 장소는 130칸의 위용을 갖추었던 행궁 주변이라고 추정되나 당시 성내(城內)에 여러 부속건축물들도 많았으므로 다른 건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필자가 의친왕의 생애에 있어서 이 거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의친왕이 귀국한 바로 이듬해에 결행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 뒤에 전개된 의친왕 항일운동(抗日運動)의 신호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1907(융희 1)년 북한산성 거사가 결행된 지 2년 후가 되는 1909(융희 3)년 10월 의친왕이 경남 거창군 소재 위천(渭川)의 전(前) 승지(承旨) 정태균(鄭泰均)의 처소(處所)를 방문하여 1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뜻있는 우국청년들과 북상(北上)의 사선대(四仙臺) 일대를 장차 의병의 근거지로 확보하려는 목표하에 일부 땅을 매입하려다가 발각되어 서울로 호송(護送)되었다.

그 이듬해인 1910(융희 4)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의 공포(公布)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불과 1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듬해인 1911년 봄에 의친왕과 손병희(孫秉熙)는 극비리에 우이동에서 회동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심도 깊은 의논을 하였다.

이어서 8월에 손병희가 우이동을 다시 방문하여 주변의 땅 3만평을 매입하게 되며, 그 이듬해에 봉황각(鳳凰閣)을 세웠다.

3.1운동의 발상지(發祥地)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봉황각에서 7년 동안 치밀한 계획이 준비되었으며, 결국 고종황제의 국장(國葬)이 중요한 명분이 되어 거족적(擧族的)인 운동으로 승화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단서가 있으니 봉황각에서 3년에 걸쳐서 49일 수련회라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천도교 교역자(天道敎敎役者)를 양성하는 교육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33인 대표 중 15명이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의친왕과 손병희가 우이동에서 회동할 당시에 항일운동과 관련된 의견교환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그러한 회동의 구체적인 결실이 바로 봉황각의 준공으로 보는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