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만수절 선물

1887년 7월, 고종의 만수절(萬壽節 생일)에 민영환과 민영소가 함께 들어가 축하를 했다. 만수절이면 감사나 수령들이 으레 진상품을 올리는데 항상 척신을 통해 바쳤다. 먼저 민영환이 경상감사 김명진의 진상품 목록을 바쳤는데 왜국 비단 50필과 황저포 50필이었다. 고종이 얼굴빛이 변하더니 진상품 목록을 상 아래로 던져버렸다. 이러자 민영환이 황공해하며 목록을 주워 소매 속에 넣었다.

이어서 민영소가 전라감사 김규홍의 진상품 목록을 바쳤는데, 춘주 오백필과 갑초 5백필, 백동 5합, 바리 50개에 다른 물목들도 많았다.

고종은 얼굴에 기쁜 빛이 돌면서 말했다.

“감사가 이 정도의 예를 차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김규홍은 나를 사랑하는구나.”

김명진의 사위인 민영환이 물러나 자기 돈 2만냥을 더해서 바쳤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때 자결한 충신이었다.

# 민영준의 전횡

1888년에 왕실은 매일 여는 연회와 세자의 복을 비는 기도를 계속했다. 하사품은 늘어날 뿐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궁중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어두운 밤에 사고가 날 것을 우려해 1887년 1월부터 들어온 전기를 매일 환하게 켜놓았는데 이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한편 고종의 신임을 얻은 선혜청 제조 민영준(1901년에 민영휘로 개명)은 온갖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았다. 광산 개발과 석탄 채굴의 이권을 챙기기도 하고, 생선·소금·구리 등 시장에서 유통되는 모든 물건에 세금을 매겼다.

더 나아가 홍삼 매매를 독점하고 중국에 팔아 이익을 챙겼다. 이렇게 하고도 돈이 부족하자 서양과 일본에서 차관을 했는데 그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한편 고종은 조정 대신에서 하인이나 장사치에 이르기까지 직위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대궐로 불러들였다. 이를 별입시(別入侍)라고 했는데, 별입시한 자는 400~500여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고종에게 돈을 바쳤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민영준은 관찰사와 수령 자리를 해마다 교체했고, 매달 5~6차례 이조와 병조의 인사담당자를 불러 미리 뽑아둔 전국의 부자들에게 참봉·도사·감역과 같은 초임 벼슬자리를 팔도록 지시했다.

초임 벼슬은 처음에는 희망자에게는 팔았으나, 나중엔 강제로 할당했다. 이러다 보니 개에게도 감역(종9품) 벼슬을 팔았다. 뿐만 아니라 과거(科擧)도 팔았다. 해마다 응제과(임금이 특명을 내려 실시하는 임시 과거)를 10차례나 실시했고, 소과도 같이 뽑았는데 소과 합격자를 200명에서 1300명으로 늘렸다.

아울러 인사회의 때마다 증직(贈職 나라에 공을 세우고 죽은 관리에게 벼슬을 하사하는 일)과 정려(旌閭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는 일)를 남발했다. 전라도 태인 부자인 유사현이 죽자, 그 후손이 조정에 수십만냥을 바쳤다. 이러자 유사현이 학행이 있다 해 판서와 제학을 증직하고 문절이라는 시호까지 받았다.

한편 관찰사와 유수 자리는 엽전 50만에서 100만 꿰미, 과거의 대과 합격은 5~10만, 소과 합격은 2~3만 꿰미였다. 실제로 근무하지도 않고 명목만 얻는 벼슬자리도 2~3만 꿰미를 호가했다.

이렇게 수령이 된 자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탐관오리가 됐다. 이들은 말로만 목민관이지 강도나 다름없었다. 아전들 또한 빌붙어 간악한 짓을 자행했다.

이러한 폐단은 고종 친정 후 일어났지만, 민영준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더욱 심해졌다(황현 지음·김종익 옮김,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2016, p7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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