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1884년 10월에 김옥균, 박영교·박영효 형제,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20~30대 젊은 급진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정변에 일단 성공했지만, 청나라의 신속한 개입과 일본군의 철수로 ‘3일 천하, 정확히 말하면 46시간 천하’로 끝났다.

1884년 10월 17일 밤 7시, 서울 견지동 우정총국에선 낙성식(落成式)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총판(總辦) 홍영식이 주관한 연회에는 후트 미국 공사, 영국 공사, 묄렌도르프 외교 고문, 청국 영사, 일본공사관 서기관을 비롯해 민영익·민병석·김홍집 등이 참석했고, 김옥균과 박영효은 물론 윤치호도 통역 자격으로 참석했다.

김옥균 등은 우정총국 밖에서 불길이 오르면 그것을 신호로 사대 수구파들을 척살하고 곧바로 궁궐로 들어가기로 했다.

밤 10시경에 바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민영익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밖으로 나가자 자객이 달려들어 칼로 쳤다. 여러 군데 칼에 찔린 민영익은 안으로 도망쳐 들어와 연회장에서 쓰러졌다.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묄렌도르프가 간신히 그를 구해 자기 집으로 옮겼다.

민영익은 동맥이 끊기고 머리와 몸이 일곱 군데나 찔리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지만, 달려온 어의(御醫)들은 어쩔 줄 몰랐다.

후트 미국 공사는 급히 의사 알렌을 불렀다. 알렌은 1881년에 미국 웨즐리언 대학 신학과,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료선교사로 중국 상해에 파송됐다가 1884년 9월에 서울에 왔는데 미국 공사관에서 무급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알렌은 지혈과 봉합 수술 등 서양 외과술로 민영익을 간신히 살려냈다. 이러자 중전 민씨가 가장 기뻐했다. 3개월 후에 민영익이 완쾌되자 중전은 알렌에게 감사의 뜻으로 10만 냥을 하사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50억 원이나 되는 거금이었다(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역사저널 그날 8 순조에서 순종까지, p 95-98).

이후 고종의 어의가 된 알렌은 근대식 병원 설립안을 고종에게 제안했다. 고종은 조선 백성 치료 기관이었던 혜민서와 활인서를 없애는 대신 광혜원(廣惠院) 설립을 허락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은 1885년 2월 29일에 개원했는데, 고종은 3월 12일에 제중원(濟衆院 널리 민중을 구제하는 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친필을 하사했다.

제중원 건물은 고종이 하사한 서울시 중구 재동에 있는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의 집이었다. 홍영식은 10월 19일 밤에 북묘까지 고종을 수행했다가 청나라 부대에 난자당해 죽었다. 홍영식 아버지 전(前) 영의정 홍순목도 손자, 며느리와 함께 약을 먹고 자살했다. 알렌이 이 집에 도착하니 피가 아직도 낭자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고, 지금은 헌법재판소라니 역사란 참 아이러니하다.

한편 알렌은 1887년에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으로 일하면서 청나라의 간섭을 견제하는 데 많은 애를 썼다.

1890년에 알렌은 다시 한국에 돌아와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해 전권공사로 마칠 때까지 15년간 서울에서 살았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귀국해 의사로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일등(勳一等)과 태극 대수장을 받았는데, 1908년에 그가 발간한 ‘조선견문록’에는 외교 비화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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