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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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향락

1873년 11월부터 고종이 친정하자 고종과 중전은 돈을 물 쓰듯 썼다. 대원군이 십 년간 모은 국고를 일 년 만에 탕진한 것이다.

“원자(나중에 순종)가 1874년 2월에 탄생하면서 중전은 복을 비는 제사를 많이 벌였는데, 팔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임금도 마음대로 잔치를 베풀었으며, 하사한 상도 헤아릴 수 없었다. (중략) 이때부터 벼슬을 팔고 과거를 파는 나쁜 정치가 잇달아 생겨났다.” (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54)

그런데 원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시름시름 앓았다. 중전은 원자의 무병장수를 위해 무당을 불러 궁중에서 굿을 하고 전국 명산대천과 유명한 절에 기도처를 만들었다. 심지어 금강산 1만 2천봉의 봉우리마다 쌀 한 섬과 베 1필, 돈 100냥씩을 시주했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특히 중전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충주 장호원에서 만난 무당 진령군을 총애했다. 비선(秘線) 실세 진령군은 수령과 변장(邊將) 인사에도 관여해 국정을 농단했다.

한편 양전(고종 부부)은 유흥을 즐겨 매일 밤 연회를 열고 질탕하게 놀았다. 광대, 무당과 악공들이 어울려 노래하고 연주하면 양전은 손뼉을 치고 좋아하며 접부채와 세모시·인삼 등 진귀한 물건들을 비 오듯 던져주었다. 밤새 계속된 연회는 새벽이 돼서야 끝났다. 그때야 양전은 잠자리에 들어 한낮이 돼서야 일어났다.

한편 중전은 사치가 지나쳤다. 서북지방에서 나는 돈피(㹠皮)는 털이 좋고 진귀해 비단보다 열 배나 비쌌다. 중전은 모전(毛廛 모피 가게)에 명해 돈피모장(毛帳) 열 벌을 급히 들이라고 명했다. 모전에서 만들어 올리자 중전이 휘장을 펼치도록 하고 구경하는 즈음에 촛불 심지가 떨어져서 순식간에 타버렸다. ‘매천야록’에 나온다. 중전은 씀씀이도 컸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조카 민영익을 살려준 미국 의사 알렌에게 10만냥(환산 50억원)을 줬다. 자신의 시의(侍醫 궁중 의사)였던 언더우드 부인이 결혼할 때는 축의금으로 100만냥(환산 500억원)을 줬다. 당시 국가 세입 480만냥의 1/5을 축의금으로 준 것이다.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역사저널 그날 8 - 순조에서 순종까지, p95~98)

돈이 부족한 고종은 매관매직은 물론 과거를 팔고, 뇌물을 받았다.

#과거(科擧)를 팔다.

1877년에 고종은 정시 문과 합격자 5명을 뽑았다. 그런데 고종은 합격자를 미리 점찍어 서하(書下)했다. 의주 부윤 남정익의 아들 규희가 수석으로 합격했는데 남정익은 고종에게 10만냥을 바쳤다. 나머지 네 사람도 고종에게 돈을 바쳤으리라.

이러자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가 고종에게 아뢰었다. “지금 서울에는 쌀이 옥과 같고 도랑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즐비한데 팔도에서 모인 과거 수험생들이 청탁은 물론이고, 과거를 판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선비들은 입을 모아 숙덕거리고 원망하는 기색이 뱃속에 가득합니다. 전하에게 이런 계획을 올린 사람은 누구입니까?”

#평안감사 민영준, 금송아지를 바치다

남정철이 평안감사로 부임한 후 고종에게 진상이 끊이지 않아 칭찬이 자자했다. 이후 1887년 12월부터 1889년 11월까지 민영준(나중에 민영휘로 개명)이 평안감사를 했는데, 그는 금송아지를 고종에게 바쳤다. 이러자 고종은 낯빛이 변하더니 남정철을 꾸짖었다. “남정철은 정말로 도둑놈이었구나. 평안도에 이처럼 금붙이가 많았는데 혼자서 다 해 먹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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