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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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에 개혁군주 정조가 붕어한 후 순조·헌종·철종 시대 63년간 세도정치가 행해졌다. 안동김씨, 풍양조씨가 권력을 독점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임금은 허수아비였다. 견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일개 가문의 권력 독점은 당쟁의 폐단보다 더 극심해 중앙의 요직 차지와 부정한 과거 시험, 매관매직으로 이어졌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특히 철종 시절에 안동김씨의 세도는 극에 달했다.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22세로 붕어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1789~1857 순조의 왕비)는 강화도에서 농부로 살고 있던 왕족을 철종(1831∼1863 재위 1848~1863)으로 삼았고, 김문근의 딸이 왕비가 됐다. 게다가 순원왕후의 동생 김좌근이 세 번이나 영의정을 해 안동김씨 세상이 됐다. 서울 장동(壯洞 종로구 자하동)에 사는 김조순의 가문은 안동김씨와 구분해 장동김씨라 불렀고, 김좌근과 김문근이 살던 집에는 벼슬을 얻으려고 뇌물을 바치는 무리들이 줄을 이었다.

심지어 영의정 김좌근이 애첩 양씨를 몹시 총애하자 벼슬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녀를 찾아가 뇌물을 바쳤다. 그녀는 본디 전라도 나주 기생이었는데 매우 영악(靈惡)해 김좌근을 홀렸다. 사람들은 그녀의 세도가 정승 못지않다 해 영의정 김좌근을 영합(領閤)이라 부른 것처럼 그녀를 나합(羅閤)이라 불렀다.

어느 날 김좌근이 애첩에게 ‘세상 사람들이 그대를 나합이라고 부른다는데 무슨 이유냐’고 물었다. 그녀는 재치있게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이 여자를 희롱해 합(蛤 조개)이라 부릅니다. 나합의 합은 조개 합이고, 합하(閤下)의 합(閤)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합은 사람들에게 조정을 농단한 비선(秘線) 실세라고 손가락질 당했지만, 고향 나주에서만은 구세주로 통했다. 전국에 기근이 들었을 때 나합은 김좌근을 설득해 나주에 대량의 구휼미를 풀었다. 이에 감읍해 나주 사람들은 나주 관아 터에 김좌근의 은덕을 기리는 ‘영의정김공좌근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한때 공덕비를 금하자고 주장했던 김좌근 자신의 공덕비였다.

영의정의 첩이 이토록 권세를 휘둘렸으니 매관매직의 폐해는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뇌물로 벼슬을 산 수령들은 임기 안에 본전 이상을 뽑으려고 악착같이 백성을 수탈했다. 수령과 아전들의 수탈로 삼정(三政 전정·군정·환곡) 문란은 극에 달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1855~1910)은 ‘수령과 아전은 강도와 다름없었다’고 개탄했다.

참다못한 백성들은 1862년에 임술 농민항쟁을 일으켰다. 2월 4일에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한 농민항쟁은 진주민란을 기점으로 삽시간에 퍼져 3개월 사이에 경상도 19개, 전라도 38개, 충청도 11개 지역에서 폭발했고 함경도·제주도에서도 일어났다.

한편 야사(野史)에 의하면 1863년에 12세의 고종이 즉위하자 신정왕후 조대비(1808~1890)가 수렴청정했다. 조대비는 김좌근의 애첩을 궁궐로 불러들여 세 가지 죄상을 추궁했다. 첫째 시골 출신의 천한 기생이 대신의 총애를 믿고 정치에 간여해 뇌물을 받은 죄, 둘째 정승에게만 쓰는 합(閤)이라는 글자를 사람들이 그녀에게 붙여준 것을 좋아한 죄, 셋째 김좌근이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 하여 김좌근의 뺨을 때린 죄였다.

이날 나합은 노기등등한 조대비로부터 닷새 안에 행장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엄명을 받았다. 이에 나합과 김좌근이 슬픔에 잠기자,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의 명령을 철회시켜주겠다는 조건으로 나합에게 거금 20만냥을 뜯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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