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선택적 정의(正義)

BC 420년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항구 피레우스의 케팔로스 집에서 폴레마르코스 등과 정의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폴레마르코스는 ‘친구에게는 잘 되게 해주고, 적에게는 잘못되게 해주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 정의이다.

이러자 소크라테스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정의가 될 수 없다며, 정의는 ‘선(善)을 증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의 저서 ‘국가’에 나온다.

나치 히틀러의 독재를 정당화한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1888∼1985)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란 글에서 ‘정치적인 것’이라는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고 했다. (정재각, 가장 아름다운 나라, p60)

그렇다면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언급된 ‘선택적 정의’란 무엇인가?

# 거리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BC 430년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델포이 신전 무녀의 신탁을 친구 카이레폰에게서 들은 소크라테스는 신탁에 반박하고자 현자를 찾아 나섰다.

그는 정치가, 시인, 장인(匠人)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을 만나보면 자신의 무지가 드러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가, 시인, 장인들은 한결같이 위선자였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전혀 깨닫지 못했고 자만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30년간 현자를 찾아다녔고 특유의 산파술로 꼬치꼬치 물었다. ‘캐물은 삶’을 산 것이다. 이러자 그를 따라다니는 젊은이들도 캐물어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젊은이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화를 내며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비방했다.

# 민주파 정치가 아니토스 등의 고발

BC 399년에 시인 멜레토스와 민주파 정치가 아니토스 그리고 변론가 리콘은 소크라테스를 “신(神)들을 부정하고 모독했을 뿐 아니라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고발했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신을 모욕한 죄(瀆神罪)’로 고발됐다. 그 근거는 BC 438년에 민회를 통과한 디오페테스 법으로 신을 인정하지 않거나 자연현상에 대한 학설을 가르치는 자는 처벌됐다. 이 법의 최초 희생자는 아낙사고라스로서, 그는 ‘태양은 아폴로 신이 아니라 불덩어리 돌’이라고 설파해 독신죄로 고발당했다. 이어서 BC 417년에 프로타고라스도 독신죄로 고발됐다.

두 번째로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고발됐다. 어떤 청년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에 나오듯이 ‘아버지가 잘못하면 아들이 때려도 좋다’는 소피스트의 궤변을 실천했다. 아니토스의 아들도 아니토스에게 반항했다. 당시 불경죄는 중대범죄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도 “병에 걸리거나 소송을 당할 때 아버지나 친척은 도움이 안 되며 의사나 법에 밝은 자가 더 유용하다고 해 부모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게 된 점”을 고발이유로 들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고발은 정치적 이유가 더 컸다. 소크라테스는 공직자를 뽑는 투표 방식 즉 제비뽑기를 비판했다. 임기 1년의 아마추어가 나라를 이끄는 것은 무능한 정부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소수의 적임자가 나랏일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투표로 뽑힌 정치가에겐 소크라테스가 ‘눈에 가시’였으리라.

아울러 고발에는 두 제자 즉 아테네를 배신한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의 우두머리 크리티아스가 연관돼 있었다. 두 사람은 아니토스의 정적(政敵)이었는데, 특히 플라톤의 외삼촌인 크리티아스는 BC 404년에 공포 정치를 자행하다가 8개월 만에 민주파에 의해 타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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