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눈에 보인다고 모두 진실이 아니다. 때론 사실이 왜곡된 그림이 진짜로 둔갑된다.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미술관에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봤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나폴레옹(1769~1821) 모습이다.

거칠게 발길질하는 백마 등에 올라탄 나폴레옹은 험준한 알프스를 넘으면서 군대를 호령하고 있다. 대포를 끌고 가는 병사들의 힘겨운 모습에서 험난한 협곡을 짐작할 수 있지만,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진군을 명하는 당당한 나폴레옹의 모습엔 거침이 없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고 외친 군인답다.

말발굽 아래 바위에는 그의 이름 ‘보나파르트’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그에 앞서 알프스를 넘은 두 사람의 이름은 흐릿하게 적혀 있다. BC 218년에 로마와 싸운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그리고 768~800년에 알프스를 3번이나 넘은 프랑크 국왕 샤를마뉴(742∼814)이다.

이 그림의 원제는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인데 다비드(1748∼1825)가 1801년에 그렸다.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섬의 소 귀족 출신 나폴레옹은 16세에 소위로 임관한다. 1793년에 24세의 포병 대위 나폴레옹은 트롱에서 영국군을 물리쳤다. 그는 일약 무능한 혁명군의 영웅이 됐고 소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이집트 원정을 통해 프랑스에 승전보를 안겨주었고 큰 별로 우뚝 섰다.

1799년 10월에 파리로 개선한 나폴레옹은 11월 9일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제1통령이 됐다.

1800년에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 당시 프랑스군은 제노바에서 오스트리아군에 포위당해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가장 빨리 제노바로 갈 수 있는 길은 알프스를 넘는 것이라고 판단해 이를 결행한다.

1800년 6월 13일 마렝고 전투에서 4만의 나폴레옹 군대는 7만의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을 받아 패색이 짙었다. 그런데 다음 날 드세 장군의 구원으로 프랑스군은 승기를 잡았고 드세가 격전 끝에 전사하자 나폴레옹이 공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과연 나폴레옹은 백마를 타고 험준한 알프스를 넘었을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폴레옹은 농부가 이끄는 노새를 타고 힘겹게 협곡을 넘었다.

그렇지만 정치 선전의 달인인 나폴레옹은 다비드에게 ‘사나운 백마 위에 올라탄 자신’을 그릴 것을 명령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뜻에 부응해 역사적 사실 자체를 조작해 카리스마 넘치는 나폴레옹을 그렸다.

다비드는 루이 16세의 화가였다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자코뱅당 혁명 정부의 공식 화가로 활약했다. 1793년 7월 13일에 공포정치의 광적 선동가 마라가 자택 욕실에서 지롱드 당원인 젊은 여성 코르데에게 살해당했다. 다비드는 마라를 ‘거룩한 혁명의 순교자’로 추모하는 ‘마라의 죽음’을 그렸다. 이 그림은 가장 유명한 정치 선전 작품이 됐다.

변신의 귀재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자 나폴레옹의 친위 화가가 됐다. 1804년 12월2일에 나폴레옹 1세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했다. 공화국에서 다시 왕조로 되돌아간 것이다.

다비드는 대관식 그림을 그려 나폴레옹 신격화에 앞장섰다. 그의 제자 앵그르도 1806년에 ‘권좌에 앉은 황제 나폴레옹 1세’를 그려 나폴레옹을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아부의 극치이다.

알프스를 넘는 그림 속 인물은 나폴레옹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 선전으로 역사적 사실은 조작됐다. 지금은 어떤가?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