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학문이 있다. 모든 것이 필요하기에 존재할 것이다. 오죽하면 공자는 논어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하였던가. 또 안중근 의사는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라 했던가. 나아가 고산 윤선도 선생은 유배생활 중에서도 ‘락서재(樂書齋)’라는 글방을 만들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기쁜 마음으로 학문 익히기를 즐겨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필자는 오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그때에 합당한 양식이 있다고 말이다. 하루 간에 먹는 양식도 아침과 낮과 저녁이 따로 있듯이, 우리가 먹는 양식엔 육신을 위한 양식도 있지만 마음의 양식도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은 우리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으니 곧 ‘자아(自我)’다. 그렇다면 이 자아를 위해선 어떤 양식이 필요하며, 오늘날 먹어야 할 양식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진정 생각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깊고 넓고 높은 내면에 대해선 그 어떤 양식으로 채워가야 할까.

필자는 태어나 자란 곳이 시골이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시야가 닿는 곳이 있었다. 그것은 저 멀리 펼쳐진 산맥의 흐름이었으며, 눈을 돌려보면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였다. 이 말을 하고자 함은 늘 눈에 보이는 것은 눈앞의 것이 아닌 저 멀리 있는 것을 보며 자라게 됐고, 늘 저 멀리 펼쳐질 꿈을 먹으며 살아왔다. 이는 스스로 그렇게 했다기보다 자란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봐진다.

하지만 지금의 환경은 어떠한가. 자고 나 마주하는 것은 그 어디든 간에 문명의 이기로 눈 앞을 가리는 것은 인공으로 쌓아 올린 높은 물체들로 모든 것이 가로막혀 있으니 넓은 들판과 멀리 펼쳐진 산맥의 흐름을 좀처럼 마주할 수 없게 됐다. 아니 마주 할 수 있다 해도 이젠 어색하기 그지없으니, 이는 문명의 이기가 주는 또 하나의 역설이다.

말하고자 함은 우리가 접하는 학문 또한 당장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한 순간 마취제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우리 스스로가 현실에 타협하고 안주하고, 나아가 욕심을 채우고자 택한 자업자득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찌하라는 말인가. 지금까지는 각자 제 갈 길로 가도록 묵인했지만 적어도 이 시대만큼은 눈앞이 아닌 저 멀리 보이는 듯 하지만 어쩌면 가까이 있는 내 자신을 찾기 위한 시대적 명령과도 같은 학문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문학(人文學)이다. 필자가 말하는 인문학의 개념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된 흔히 말하는 인문학(역사 문학 철학 등)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며 진정한 인문학 즉, 종교를 일컫는다. 누구나 종교성이 있으면서도 종교를 터부시하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상이 됐다.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내서 이 인문학을 깨우쳐가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이때 우리 모두가 반드시 먹어야 할 이 시대의 때에 따른 마음의 양식인 것이다.

왜 인문학인가. 거듭 밝히지만, 인간의 근본을 탐구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하는 최고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인간의 근본에 대해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흔히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이 있기에 그분을 조물주 내지 창조주라 한다. 그 외 모든 만물은 그분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으니 곧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아무리 잘난 체해도 말이다.

자기를 낳아 길러 준 부모만이 자기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고 있듯이, 자아(自我) 또한 그와 같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치다.

그렇다면 나를 찾기 위해선 나를 창조하신 조물주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종교를 통해 종교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알 때 비로소 내 자신을 찾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안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길 도(道)라 하는 것이며, 그 길로 안내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래서 이 종교는 무조건 ‘믿습니다’가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 길이 곧 종교며, 종교는 약속의 글이며, 인생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지침서다. 이러한 약속의 글 종교는 과연 무엇을 약속하고 있을까. 인생의 끝, 종교의 끝, 곧 말세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말세(末世)란 글자대로 보자면 세상이 끝난다는 의미다. 왜 세상이 끝나야 하며 끝난다면 우리는 어찌 된다는 말인가. 이 모든 궁금증의 답이 바로 종교라는 인문학을 통해 소상히 밝혀지게 된다면 오늘날 우리가 먹어야 할 양식은 참으로 종교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인문학이 틀림없다.

세상의 끝은 끝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임을 인문학은 알리고 있다.

밤이 깊어갈수록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말세를 만나 끝나는 세상이 어디며, 반면에 오는 세상 즉, 새 시대는 어디인가를 분별하는 것이다.

물이 흘러가도 그냥 흘러가는 것 같지만 물길을 따라 흐르며 또 목적지를 향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이 세월이 흘러가는 것도 향방 없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우주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의 철저한 계획하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절차대로 흘러왔고 또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흘러갈 것이다.

이제 우리가 알 것은 지금의 때는 그 계획 가운데 어디쯤 와 있으며, 또 앞으로 남은 일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다. 따라서 알지 못하던 시대는 허물치 않는다. 하지만 이젠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천택지인(天擇之人) 즉, 하늘이 택한 한 사람을 명하여 인생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제시했다면 듣지 못했다 핑계할 수 없으며, 공의로운 심판만이 기다릴 것이다.

ⓒ천지일보 202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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