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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 의해 8분 46초 동안 무릎으로 목 눌림을 당해 사망한 사건이 지금 지구촌을 달구고 있다. 약 6개월 동안 핫이슈를 선점해 오던 코로나19 사태는 이번 흑인 사망 혹은 미국 폭동이라는 이슈로 말미암아 그 자리를 빼앗길 지경에 처했다.

미국을 위시한 지구촌의 인종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미국의 인종갈등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 된 남북전쟁이 증명하듯이 지구촌 인종갈등의 상징처럼 인식 돼 왔다.

그러한 인종갈등은 분쟁과 전쟁의 불씨가 되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이 늘 잠복해 있었으며, 급기야 금번 흑인 사망을 통해 우려가 현실이 되면서 세계적 이슈를 선점하게 됐다.

여기서 미국 인종갈등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지금의 아메리카 합중국(미국)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데 이어 1513년 최초의 유럽인이 플로리다에 상륙했고, 1634년 약 1만 명의 영국의 청교도가 뉴잉글랜드 지방에 정착했으며, 이후 미국 독립전쟁 때까지 약 5만 명의 죄수가 영국에서 건너가 오늘의 미국을 건설했다면 오늘의 미국은 그 뿌리가 영국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발견하고 개척하고 정착한 신대륙 즉, 아메리카대륙은 먼저 황색인종인 원주민(인디언)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동양인으로 베링해협을 건너 지금의 알래스카를 거쳐 전 아메리카 중남미 대륙에 흩어져 부족을 이루며 높은 문명과 문화를 일으키며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유토피아와 같은 대륙은 먼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남미 대륙이 식민지화 되면서 원주민들이 일으킨 마야문명과 잉카문명과 같은 찬란한 문명과 문화는 그들의 무자비한 침략전쟁으로 사라져야 했고, 소위 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이 유입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그 후 앞서 언급했듯이 유럽 내지 영국인들의 이주가 시작됐으며, 그들이야말로 정의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한 살육을 통해 원주민들을 몰아냈고, 영토를 탈취했으니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표본이 됐다.

그 터 위에 세워진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답게 지구촌 각국의 이민을 받아들이면서 지구촌 모든 민족 국가 인종 종교를 아우르는 합리적 국가로 자리매김하면서 오늘의 강대한 미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다시 말해 오늘의 미국이 되기까지의 일등공신은 바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합리적 인식과 가치관이었다.

그러나 툭하면 발생하는 인종갈등과 오늘의 참극이 증명하듯이, 그 위선과 거짓의 실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야 만 것이니,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함과 같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그들의 실체를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시 영국에서 건너간 이주자들은 대부분 영국의 청교도들이었으며, 이들은 당시 영국으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으며 처형당하기 전 살길을 찾아 건너간 죄수 내지 범죄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중세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태동한 또 다른 종파 중 하나인 칼뱅이 창시한 칼빈교 즉, 장로교인 들이었으며, 이주한 후 미국 기독 장로교의 효시 역할을 하며, 미국 재건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들은 이 장로교의 이름 내지 뉴프런티어라는 미국의 개척정신을 일으켰고, 원주민을 마녀사냥 하듯 약탈하고 죽이는 데 장로교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자신들의 불의를 정의로 둔갑시켜 합리화시키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어 그들은 온 세계 저개발국을 선도한다는 이름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해 자신들의 불법을 정당화시키며 오늘의 미국의 일류화를 세뇌시켜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장로교 교리와 사상으로 세뇌화한 대표적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일제 식민지와 동족상잔으로 의지할 곳 없는 이 한반도는 그들의 요긴한 활동무대가 되기에 안성맞춤이 됐고, 우리는 철저히 그들의 사상에 길들여져 왔던 것이다.

적반하장이 된 인종갈등, 살펴봤듯이 과연 누가 그 땅의 주인이고 누가 종인가.

코로나19가 지구촌을 덮치며 가져온 변화의 물결은 인종갈등이라는 또 다른 사건이 촉발되면서 변화의 변화를 가속화 시키고 있다.

사람으로선 할 수 없던 일이 대자연의 섭리 가운데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순리를 역리로 뒤집으면서 인간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게 됐으니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이쯤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지구촌의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며 밀어닥친 변화의 물결이 과연 변화라는 단어로 만족할 수 있을까. 그것은 변화를 넘어 회복이라 말하고 싶다.

‘폭풍이 지난 뒤엔 고요가 온다(After a storm comes a calm)’는 서양 속담처럼, 작금의 이 환난들은 원래의 고요와 평화의 세계로 회복되는 것이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아닐까.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이방이 주인이 되고 주인이 이방이 되고 종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이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지구촌의 주인이 떠나가고 피조물인 종이 주인이 되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적반하장이 돼 허무한 데 굴복당해 아우성치며 살아왔다. 이제 주인이 제자리로 찾아오고 만물이 회복되는 과정 속에서 있게 되는 대 혼란이 지금 눈앞에 전개되고 있음을 깨닫고 섭리 가운데 진행되는 회복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 어떨까.

김진호 화백. ⓒ천지일보 2020.6.14
김진호 화백. ⓒ천지일보 202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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