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노산도교(嶗山道敎)
[고전 속 정치이야기] 노산도교(嶗山道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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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노산은 도교의 명산으로도 유명하다. 춘추전국시대로부터 진한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방사(方士)와 무속인들이 노산에서 수련을 했으며, 당송시대에는 도교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원명대에 이르면 노산도교는 최전성기에 접어든다.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 청도인민정부에서 한대 2, 당대 1, 오대시대 1, 송대 1, 원대 5, 명대 5, 어느 시대인지 불분명한 2곳 등 17개의 도교사원을 찾아냈다. 청대에 와서도 도교가 시들지 않아서 청말에 17곳에 200여명의 도사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 도교사원은 노산과 사천성 성도(成都) 부근 청성산(靑城山), 강소성의 모산(茅山)이 유명하다.

역대 도교 사원인 궁과 관은 모두 전답을 보유했다. 청산촌(靑山村) 주민들은 모두 태청궁(太淸宮)의 소작인들이어서, 봄가을에 태청궁에 세금을 받쳐야했다. 청의 가경(嘉慶) 년간에는 즉묵현령이 태청궁이 차지하는 토지의 범위에 대한 판정을 내리기도 했으며, 함풍(咸豊) 시대에는 현령이 백성들에게 태청궁의 수정석(水晶石)을 파내지 못하도록 명했다. 관우(關羽)를 모신 관제묘(關帝廟)와 마찬가지로 도사 4~5명이 있는 작은 묘당에도 무려 60묘나 되는 토지를 주었다. 자료에 따르면, 도교에 대한 역대 조정의 비호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청도를 차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동안 도교사원의 도사들은 태화관(太和觀)이 25세대, 옥청궁(玉淸宮)과 태평궁(太平宮)이 24세대나 세습됐다.

노산일대 대부분이 도교와 관련된 땅이었고, 주변 사람들은 거의 도교사원의 소작인이었다. 역대정권이 도교를 우대한 것은 다른 종교와 달리 도교가 가진 단단한 조직력과 정부의 권위를 크게 인정하지 않는 교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중국정부가 가장 골치를 앓고 있는 것이 파륜공의 확산이다. 파륜공이 보급되는 과정을 보면 도교를 근간으로 결집되었던 과거의 반정부단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진나라가 통일을 한 다음부터 산동은 정치적 중심에서 비교적 멀어졌지만, 천연의 조건과 문화적 자부심, 그리고 산동사람들의 호전적이고 강인함이 도교라는 종교적 조직으로 결집될 때는 반드시 큰 반란이 일어났다. 역대 정권은 그것을 가장 경계했던 것 같다. ‘산불재고(山不在高), 유선즉명(有仙則名)’이라는 말이 있다. 높은 산은 아니라도 신선이 살면 명산이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노산은 경치는 아름답지만, 바다를 끼고 있고 산림이 울창해, 일반인들이 쉽게 오르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지 못했다. 소동파는 이런 글을 남겼다.

“노산에 은자가 많다던데, 듣기는 했지만 보지도 못했고, 보더라도 다가가지 못한다네.”

악정자(樂正子)는 늘 노산에서 선단을 만들어 먹고 180세가 됐지만 홍안에 학발을 유지했다. 안기생(安期生)은 노산과 봉래산을 오가며 참외만한 크기의 대추를 먹고 살았다.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풍경이 서로 융합되어 신기한 전설을 만들어냈으며, 거기에서 여러 가지의 민간고사가 탄생했다.

역대의 제왕들도 자기의 생명과 사직이 만세에 이어질 것을 갈망하면서 노산에서 그 방도를 구하겠다고 생각했다. 진시황도 노산에 올라갔다가 봉래산을 기대하며 서복(徐福)에게 바다로 나가 선약을 구해오라고 했지만 사기꾼에게 걸리고 말았다. 한무제는 노산에서 신인에게 제사를 지냈고, 당태종과 송태조도 노산과 인연을 맺었다. 일세의 영웅 징기스칸도 친히 금호부패(金虎符牌)와 성지를 새겨 노산 태청궁에 걸어 놓았다. 800년이 지난 지금도 보존상태가 양호해 평범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사료적 가치가 상당하다. 노산의 도교가 발전한 원인은 도교철학이 중국의 전통도덕관에서 비롯됐으며, 역대로 뛰어난 수행자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노산도교는 흔적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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