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어떻게 하면 주어진 시공간에서 사물과 나와 관계를 적절히 해결할 수 있는가? 바로 ‘지(智)’가 필요하다. 지(知)가 경험의 총체라면 지(智)는 경험을 넘어선 직관적 판단으로 구체적인 사안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지(智)는 인간의 생명활동과 사고활동의 핵심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훈련이다. 훈련의 결과 축적된 것이 ‘식(識)’이다. 식은 새로운 상황을 만났을 때 무너지기도 한다. 경험과 새로운 환경이 만났을 때 지(智)의 빛이 찬란해진다. 불경에서는 감각으로 축적된 식을 버려야 궁극적 지혜인 ‘반야마라밀’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선종(禪宗)은 언어와 문자의 한계를 인정하고 ‘불립문자,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경지에 이르려고 한다. 선종이 문자로 이루어진 불경을 통해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려는 교종을 비판하기 위한 수행법이라고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이르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길이다. 문자나 말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깨달으라는 말인가? 깨달았더라도 다른 사람과 소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말로도 글로도 행동으로도 뜻을 모두 전달하지 못하고, 심지어 뜻으로도 인간의 자성(自性)을 전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인간의 진실을 알 수 없게 된다. 공자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답을 내렸을까? 역경 계사전의 설명은 차라리 본문이 더 쉽다.

“성인의 뜻은 알 수가 없다. 성인은 상(象)을 만들어 그 뜻을 모두 드러냈고, 괘(卦)를 지어서 진실과 거짓을 모두 드러냈으며, 문장을 다듬어서 그 말을 모두 드러냈고, 변통으로 사물의 유리한 점을 모두 설명했다.”

상(象)은 상(像) 즉 상징이나 이미지를 의미한다. 계사전 제8장에 따르면 ‘상’은 천하의 오묘한 비밀을 보고 그 형상과 용모를 비슷하게 모사한 사물의 그럴듯한 모습이다. 결국은 말이나 글로 진의를 표현할 수 없어서 그림을 그렸다는 뜻이다. 왜 성인은 말이나 글이 천하의 깊고 오묘한 비밀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했을까? 문자와 말이 지닌 표현력의 한계와 구속력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과 문자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상이 필요하다. 왜 상인가? 사람의 인식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한 마디 하는 것처럼 어차피 사물의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인정하면 다의적 해석도 긍정할 수 있다. 이 긍정은 인간의 개성의 사회성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다의적 해석끼리의 충돌이 아니라 외연의 확장을 통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갈 수 있다.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동질의 원소가 아무리 모여도 외형은 변하지만 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학에서는 양의 변화는 질의 변화로 이어진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의 환희가 열반이다.

설명의 뒤에 붙인 ‘고지무지이진신(鼓之舞之以盡神)’은 오묘하다. ‘고지무지’라는 말에서 2개의 지(之)를 빼면 고무(鼓舞)라는 말이 된다. 고무는 흥미의 유발이다. 공자의 ‘상’에 대한 설명보다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해 신통한 경지까지 파고들게 한다는 이 말이 더 좋다. 남회근(南懷瑾)은 이 문장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전제를 붙이고 ‘고무’를 충만하고 승화된 최고의 지혜라고 했다. 왜 그런 뜻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아쉽다. 그러나 나는 최고의 지혜를 얻기 위해 북을 치고 춤을 추어야 한다는 글자 그대로의 풀이가 더 좋다. 지혜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험한지는 지혜롭지 못한 내가 이해할 수 없다. 신명이 나지 않으면 힘든 과정을 감당하지 못한다. 지혜에 이르는 험난한 길을 과연 한 번의 결심으로 갈 수 있을까? 출발했지만 문밖도 나가지 못하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스스로에게도 필요하고, 지혜를 찾는 타자에게도 필요하다. 남회근의 해석은 너무 고매하고 난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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