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장자의 붕(鵬)은 시경의 학(鶴)이 풍진을 넘어 영겁의 세계로 비상한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장자의 붕이나 시경의 학을 닮은 사람은 보이지 않고, 창공을 나는 학이나 대붕인 것처럼 하다가 날개가 찢어지고 유혈이 낭자한 자들이 난무한다. 장자의 지적은 요즈음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

“잘난 체하는 사람들은 관직 하나 정도 맡을 지식이나, 고을 하나 겨우 다스릴 수 있는 행정 능력을 지녔을 뿐이다. 인품은 고작 군주의 마음에 들어 나라의 성과를 자신의 치적이라고 자랑하는 정도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매미나 뱁새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송영자(宋榮子)는 그런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는 칭찬 때문에 분발하지 않고, 비난 때문에 낙담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고 있으며, 무엇이 참된 명예이고 치욕인지 구분할 수 있다.”

장자의 평가는 인색해, 송영자도 아직 독립된 인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열자(列子)는 바람을 마음대로 부린다. 허망한 세상을 유쾌하게 떠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열자도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 고작 보름이면 다시 세속으로 돌아온다. 행복을 누리고 싶지만 이루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열자가 자유롭다고 하지만 장자는 아직도 완전히 독립된 인격을 갖추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의지하려고 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장자가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은 누구일까?

“지인(至人)은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신인(神人)은 위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성인(聖人)은 누구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장자의 평가가 너무 심하다. 평범한 사람은 장자가 매미나 뱁새라고 혹평한 사람들도 쉽게 만날 수 없다. 송영자나 열자와 같은 지인, 신인, 성인을 어떻게 만나겠는가? 그의 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더라면 장자가 그토록 아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자는 논리학자 혜시(惠施)와 친구였다. 혜시는 그리스 소피스트처럼 엄정한 이성적 논리로 인간이 통념적으로 지각하는 것에 내재된 문제를 파헤쳤다. 장자는 극단으로 파고드는 그를 비꼬았다. 그러나 그도 보통 사람의 인식범주를 넘어 광대한 우주로 현상을 확대했다. 둘은 절대적 진리를 찾으려는 열정이 있었으므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극단까지 가야할 필요가 없다. 수학의 집합적 범주에서 결정해야 할 일들이 더 많다. 절대적 진리를 강조한 플라톤도 이상국가가 불가능하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한다고 했다. 문제는 나의 안목과 그릇이다. 매미나 뱁새의 시각밖에 지니지 못했다면 대붕의 꿈과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바탕이 ‘생이지지(生而知之)’는커녕 ‘학이지지(學而知之)’도 감당하면 ‘곤이학지’라도 추구해야 한다. 안목을 키우려면 일단 길을 나서야 한다.

남이 몰라준다고 하여 자신을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언젠가는 알아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묵묵히 자신의 실력과 인격을 닦고 있을 것인가? 장자는 초연하게 대자연의 공간을 소요하면서 지내라고 권했다. 그러나 공자의 권유는 다른 느낌이다. 공자는 우선 평소에 언행을 잘 다듬어야 한다고 권한다. 그 다음 천하에 도가 시행되면 나아가서 그것을 시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는 가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언행을 잘 닦았으면 천하가 알아준다는 공자의 신념은 어쩌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집에서 잘난 척 한다고 누가 알아주랴? 그러나 공자의 말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다고 함부로 언행을 방자하게 하면 그것이 습관으로 변한다. 만약 기회를 만나더라도 못된 습관이 들었다면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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